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번 대법원에서 횡령과 뇌물 등의 혐의로
징역 17년의 실형을 확정받았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다스를 지배해 왔으며
349억원가량을 횡령하고 삼성전자가 대신 내주었던
다스의 미국 소송비 68억 등
뇌물 110억을 챙긴
혐의를 받고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최종 실형이 확정된 것인데요.
항소심과정에서 삼성 뇌물 액수가 커져
1심보다는 형량이 늘어나
17년 징역에 벌금 130억원, 추징금만 57억 8천
여만원을 선고한 상태입니다.
길고 길었던 이명박의 횡령 뇌물 사건이
마무리로 접어들었는데요.
대통령으로서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부모님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
오사카에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러나 경북 포항으로 이주했는데요.
그는 학창 시절을 포항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때 그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6.25 전쟁이 터졌고 이 전쟁으로
누나와 남동생을 잃었다는 가슴 아픈 가족사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는 포항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이후 고려대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되는데요
그는 무려 상과대학의 학생회장으로
고려대학교 재학 중에 박정희 정권의 한입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는 일까지 있었죠
그는 이후로도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 함께 했던
인사들과 6.3동지회를 결성해 그 단체의 회장까지
역임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이 학생운동의 동지로는
유명한 정치인인 이재오, 손학규, 한광옥, 김덕룡 등
이명박 말고도 훗날 나름대로 거물급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후 '기관지 확장증'으로
군 복무를 면제받았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의 업적 중 하나를 기록하게 되는
현대건설에 경리과 직원으로 입사하게 되는데요
당시 학생운동 경력으로 집행유예 이력이 있던
이명박은 취업전선에서 힘든 상황을 겪었습니다.
당시 운동권 학생은 면접에서 떨어지기 마련이었죠
더군다나 그는 학생회장으로
데모의 주동자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실력이 있어 필기시험에
합격했는데도 최종 합격이 어렵게 되자
직접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내서 최종 합격을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냥 '썰'로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박정희가 당시 현대 회장인 정주영에게
"이명박을 조심해라"라고 경고를
했다는 썰이 있습니다.
물론 확실한 팩트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들은 그가 두둑한 배짱과
포부가 있는 청년이었다는걸 말해주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학생운동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사람이
직접 청와대에 글을 보내 정부가 개인의 앞날을
막는 것은 안 된다는 편지를 보내 취직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더군다나 박정희 정권 시대에 말입니다.
이 시기는 청년 이명박의 실력이 만개한
그의 인생 첫 번째 전성기로
그는 입사하자마자 초고속 승진과 함께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현대 경영진의 인정을
받습니다.
이제는 회사원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만화 같은 현대시절의 경력을 보자면
1965년 현대건설의 '평사원'으로 입사
1968년 현대건설의 과장
1969년 현대건설 부장
1971년 현대건설 이사
1973년 현대건설 전무
1974년 현대건설 부사장
1977년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1988년 현대건설 회장
정말로 아무리 시대를 생각해야 한다지만
평사원으로 들어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만화같은 승진을 할 수 있는지
더군다나 현대같은
이 당시에도 또 지금도
대한민국 NO. 1급 기업에서
이런 일은 다시는 불가능할듯싶습니다.
이명박은 이 당시 현대 정주영 회장에게
가장 큰 사랑과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
항상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다고 하죠.
앞서 말했듯 그는 학생운동을 하던 출신 때문인지
처음 입사 후 해외 건설 현장에 배치되게 됩니다
그는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성실하게 근무했지만,
당시 그가 근무하던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은
치안이 좋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여건에 대한 불만도
극심하여 건설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흉기를
들고 사무실의 금고를 털려고 했지만,
이명박이 절대 못 준다며 끝까지 막아낸 일로
"신입사원 이명박이 혼자서 금고를 지켜냈다"라는
소문이 나, 그는 기업 내에서 영웅이 됩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때도 '불도저'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때는 그가 한창때인 20대 시절이니 그 패기와
혈기가 그의 평가에 큰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이명박은 이후 귀국해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에 아파트
공사가 늘어가며 회사는 번창하게 됩니다.
이명박이 계속 승진을 하고
30대에 시장에 오르자
언론은 이명박같이 젊은 인물을 어떻게
사장으로 앉혔는가? 라는 질문에
"그를 신입사원으로 뽑았더니 과장의 일을 해내고
과장을 시켰더니 부장의 일들을 하고
상무로 임명했더니 사장 일을 해내더라"라는
말을 했는데요.
이것은 정주영 회장이 얼마나 이명박을 아끼고
인정했는지를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여러 후계 구도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명박에 대한 이런 신뢰와 초고속 승진은
나름대로의 부담이 되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명박은 이후 현대건설의 회장으로 승진하며
일선에서 물러나고 1992년 현대를 퇴사하게 되는데
정주영 회장은 재계뿐이 아니라 정계에까지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1992년 정식으로
대통령 후보에까지
출마하게 됩니다.
90년대 초반 시점에서는 삼성이나
다른 기업들보다도
더 높은 현대는
국내 1위 기업이었습니다.
이명박은 정주영이 부에 이어
권력까지 움켜쥐려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주영을
막을 수는 없었고
그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합니다.
정주영과 이명박 사이가 갈라석 된 것은
이 사건들이 원인이었습니다.
정주영은 통일국민당원으로서
이명박이 함께 해줄 것을 권했지만
정치적 견해가 달랐던 이명박은 이를 거절합니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에서 물러나고
1992년 본인도 정계 진출을 선언합니다.
그는 오랜 시간
그의 멘토였고 가족보다 더한 동반자였던
정주영의 제의를 거절하고 김영삼의 민자당으로
합류합니다. 정주영은 대선에서 무려 아파트값을
반값으로 낮춰 공급하겠다란 공약을 걸었고
큰 인기를 끌었으나 당연히 집권당인
민자당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공약이라며
태클을 걸었는데 이때 앞장선 사람이 바로
이명박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대건설의 회장 출신이
이거는 말도 안 되는 공약이다라고 나오니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죠.
결국 14대 대통령 선거는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였던
김대중과 대한민국
최고 기업인 정주영을 누르고
김영삼의 승리고 끝나게 됩니다.
정주영의 정치적 야망은 끝나게 됩니다.
여담으로 후에 2001년 정주영 회장이 별세했을 때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이명박은 당연히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빈소를 분향합니다.
정주영은 정치적 견해가 달라
말년에 이명박과 척을 지긴 했지만
분명하게 청년 이명박을 알아준 사람이었고
그의 위치를 잡아준 멘토이며
누구보다도 이명박을 아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직을 나온 후
민자당 소속으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혀여 당선!
정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그는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이종찬과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지만
그의 선거캠프에서 선거비용을 거짓 신고했다고
언론에 폭로하고 이명박의 측근들이 관련자를
외국으로 도피시켰다는 사실까지 밝혀져
후에 그는 자진 사퇴하게 됩니다.
때문에 종로구에서는
다시 보궐선거가 이루어지게 되고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게 됩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
1999년 대법원에서
최종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게 되지만 1년 후 광복절 특사로
사면 복권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훗날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 이명박은
둘 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정계로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면복권되어 정계에서 다시 활동하게 되는데
2002년 한나라당의 서울특별시장 선거의 후보로
최종 선출되어
여당의 후보인 김민석을 누르고
서울시장으로 당선됩니다!
그는 현대건설의 수장이었던 경력에 걸맞게
서울의 외관적인 부분을 손대게 되는데요.
서울 시장 시기는 이명박의 현대시절과는 또 다른
그의 2번째 전성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명박은 공약이었던 청계천 복원 사업을
시행하였고 이는 그의 서울시장 경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평가를 받은 업적으로 불립니다.
무리한 공사를 단기간에 밀어붙였다는
비판도 받지만 청계천 복원 사업은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았고
그가 대통령의 길로 가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는 사업이었죠.
또한 서울의 대중교통체계를 개편하여
교통 카드를 도입하였고 이동 거리 비례에
따른 환승체제를 도입하여
버스 회사의 재정을 원활하게 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또한 '아리수'를 브랜드화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고
뉴타운 사업 및 서울숲 조성 등
이 서울시장 시절의 시정능력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우수한 평가를 받으며
사실상, 이 서울시장 때의 긍정적인 평가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진정한 인생 절정기였습니다.
성공적인 시장으로서의 커리어는
국민들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었고
또한 이명박은 기업인으로서도 믿을 수 없는
성공을 기록한 남자였기 때문에
이 당시 그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습니다
또한 당시는
참여정부의 말년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었고
민생과 경제 파탄에 대한 책임론이 부각되던 시절에
여당 또한 분열과 다툼으로 지지율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에 정권 심판론이 대세를 차지하던 시절이었죠
때문에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된다면
굉장히 당선이 유력한 시점이었습니다.
이때 박근혜와 이명박이 경선에서 붙게 되는데
엄청난 진흙탕 싸움을 서로 하며
쇼미더머니를 방불케 하는 디스전이
펼쳐지기도 했고
이명박이 대선 선거 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선거법 위반이나 위장전입 전력 등으로
수많은 공격을 받기도 하고
잊혀진 사나이였던 이회창 후보가 출마 의사를
밝히며 그의 지지율에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선거를 바로 코앞으로 앞두고 BBK 동영상이
터지기도 하는 등 수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이미 기운 판세를 어쩌지는 못했습니다.
이명박은 선거 초반부터
'경제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확실히 부각시키며
기업인으로서의 신화와 서울시장 시절의 업적
등으로 이미 대세를 형성시켜 놓았고
17대 대선을 말 그대로
압승하게 됩니다.
정동영, 권영길, 이인제, 허경영, 이회창 등을
모두 누르고 48.7%의 득표율을 얻어
2위 정동영 후보를 22.6% 차이
표차 5,317,708표 차이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최다 득표율 차이로
말 그대로 압승하게 되죠.
이명박은 호남권과 충북 보은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1위를 기록합니다.
또한 보수 정당이
서울에서 대선을 승리한 것은
17대 대선이 유일합니다.
2위 정동영은 호남에서만 다 승리하고
이명박에게 완패하게 되죠.
이명박은 대통령에 당선되는 시점까지만 보면
진심으로 대단한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개 평사원이 현대건설의 회장까지 올라섰는가
하면 정계 진출 후에도 승승장구하며 국회의원과
서울시장 그리고 대통령까지 오르는
인간승리를 보여줍니다.
전에도 또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
이런 커리어를 쌓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던 청년이
재계와 정계 모두에서 정점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민심을 잃었던 참여정부의 뒤를 이어
압도적인 지지로 시작된 이명박 정부는
앞서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같은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본인의 이름을 붙여
당당하게 출범하게 됩니다.
이 당시 많은 기대를 받고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최초의 CEO 출신 대통령이며
서울 시장 시절에도 훌륭한 시정능력을
보여준 그에게 다른 건 몰라도
이명박 정부가 경제만은 살려줄 것이다.
라는 기대를 많은 이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권 기간은 참여정부 못지 않은
험난한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2부에서는
그가 대통령이 된 후의 일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참조 : 역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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