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님의 파란 만장한 삶을 알아봅니다.
이병철은 기업인으로서 삼성 설립자 겸 3대 회장입니다. 전자 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분 덕분에 한국의 경제가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의 삼성, 신세계, CJ, 한솔, 중앙일보가 모두 이병철로부터 나온 것이며 범 삼성가라 불리며 현재도 한국에서 1위 그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성 이외에는 이벼얼 사후에 모두 뿔불이 흩어지긴 했지만 한솔은 장녀인 이인희씨가 CJ는 장남인 이맹희씨가 삼성은 이건희씨가 물려받았으며 5번째 딸인 이명희가 신세계 그룹을 받았습니다. 흩어졌다고는 해도 다 같은 집안 사람이에요.
이병철은 할어버지 때 만석꾼 집안의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냅니다. 만석꾼은 곡식 만성 가량을 거둬들일 만한 돈을 바칠만한 돈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공부의 재능을 보여서 서울 종로에 중동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합격하지만 건강때문에 중퇴를 하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몸을 돌본 뒤에 다시 상경해 2년 동안은 서울에서 아버지가 보내 준 돈으로 생활을 합니다.
자서전에서 취직 같은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걸로 봐서는 계획을 가지고 상경한 것은 아닌 걸로 보이며 직접 일본 상업 작물 종자를 들여오고 개량 돼지와 시암탉도 가지고 왔으나 취미 수준이었다고 자서전에 나오죠.
고향의 친구들과 골패라고 도박의 한 종류인데 골패에 빠져 매일 같이 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합니다. 집이 워낙에 부자인지라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직업이 없었음에도 결혼한 나이 26세에는 아이가 4명이었습니다. 이때가 터닝포인트인데 자서전의 내용을 빌려 보자면 방문을 열고 달빛이 비친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나는 듯한 심정을 받았다. 그렇게 자신을 자책하며 생각에 빠지는데 독립운동이냐 일본 공무원이 되느냐 아니면 사업을 할까? 아니면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다 결국 사업으로 정하도 마음을 다잡습니다.
인터뷰에서 이 때를 어떻게 생각하냐 물으니 헛된 시간이 아니라 삼성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시기라고 말하며 어떤 인생에도 남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10년동안 아무일 안하고 낚시만 했다고 칩시다.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10년에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무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냐에 있습니다. 라고 인터뷰한게 있는데 공감이 가시나요?
부친에게서 받은 쌀 300석 분의 토지로 사업을 일으켜 마산에서 협동 정미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정미소 사업이 잘 되자 운수업에도 진출하였으며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서 조홍제 허정구와 함께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1942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합니다. 조선양조를 인수할 때 커피로 유명한 동서식품을 키워낸 김재명 전 제일제당 시장이 이 때 삼성으로 합류하여 이병철과 30년간 같이 일을 합니다.
사업이 하나 둘 돈을 벌어오기 시작하며 이제 부동산 투자에도 손을 댑니다. 부동산으로 돈을 좀 만졌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지며 사업도 몰락하고 부동산도 몰락하여 부동산에는 손을 떼버립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금방 복귀하여 전쟁 이후에도 부동산 이외의 사업은 건실하게 운영이 되었고 경제적인 관점에서 일제의 패망을 짐작하여 사업을 더욱 크게 키웁니다.
이후 6.25사변이 발생하고 정부발표를 믿고 전쟁이 금방 끝날것이라고 생각해 서울에 있었지만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90일간은 북한군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는 신세가 됩니다. 이때 시민들의 살림살이를 징발하는 북한을 보며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되고 거기다 물자를 샇아둔 창고 같은게 털리면서 손해도 크게 보게 됩니다.
이후 운전기사 위대식의 헌신으로 서울을 탈출하는데 이 일로 위대식은 운전기사였음에도 삼성그룹에서 이사대접을 받으며 위대식이 사망하자 이병철이 자기 무덤옆에 묻어주라고 할 정도로 신임이 대단했습니다.
서울에서 벌어놓은 돈으로 부산에 삼성물산을 1951년에 설립하고 전쟁으로 인해 사방에 널리게 된 고철을 수집합니다. 이 고철을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쇠가 부족했던 일본에 다시 팔고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홍콩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 , 사업 6개월만에 삼성물산은 당시 돈으로 10억이 넘는 수익을 올리며 1년후 60억의 재산을 쌓으면서 단숨에 재기에 성공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국에 널려있던 구리탄피들을 긁어모아 이를 재수출하는 사업까지 하면서 돈을 말그대로 쓸어담습니다. 40~50년대에 시행착오를 거쳐서 50년대 후반에 성장가도에 오른 정주영 회장과는 달리 큰 실패 없이 승승장구 했기 때문에 이승만정권 시기에는 이미 국내 1위의 재벌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삼성물산에서 모은 자금으로 1953년 제일제당을 만드는데 이게 이미 알고 있는 지금의 CJ입니다. 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지금의 삼성 그룹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설탕이 상당히 비쌌는데 근당 300환하던 설탕값을 50환까지 낮추는데 기여하고 정부의 모직물 수입 금지조치가 행해지며 제일모직은 국내시장에서 급격한 성장을 합니다.
이승만과는 독립협회에서의 인연으로 친분이 있었는데 4.19혁명으로 정권이 몰락하며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검찰에 연행되어 벌금 50억을 내게 됩니다. 당시 50억이면 상당히 큰 금액이지만 이미 삼성은 50억이면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커져있었죠. 그런데 이게 웬걸 5.16군사정변이 일어납니다.
박정희 정권이 명분의 정당화를 위해서 경제인 11명을 부정축재자로 하여 구속하였는데 제계1위 기업인 삼성의 이병철은 1호로 불리며 이병철을 부패혐의로 몰고갑니다. 결국은 경제운용과 성장을 위해 타협하였고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의 군사정권은 협력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10년간의 곡절 끝에 이승만때부터 계획해오던 비료공장을 설립하게 되고 울산에 백만평 부지를 매입해 연36만톤이 생산 가능한 사업장을 짓습니다.
연 36만톤이면 당시 세계 최대규모였죠. 참고로 당시 2등이 18만톤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업장을 짓는 와중 또 한번이 시련이 닥칩니다. 유명한 사건이죠. 사카린 밀수 사건.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삼성이 비료공장을 짓기 위해 만든 회사, 한국비료공업이 일본 미쓰이그룹과 공모하여 사카린 2259포대 약 55톤을 건설자재로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킨 사건입니다. 이름 그대로 밀수죠.
당시 소문으로는 중앙정보부의 비호하에 박정희 정권에 비자금을 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참고로 삼성그룹의 한국비료공업은 현재 2015년 롯데에 인수되어 롯데정밀화학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카린 밀수 일로 국민들의 비난을 받게 되고 책임을 진다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한국비료공장과 삼성그룹이 운영하던 대구대학교 현재 영남대학교를 정부에 넘기게 됩니다.
참고로 한국비료공장은 첫 해 매출액이 당시 삼성 매출의 30%를 차지하는 알짜기업이었는데 책임을 진다고 넘긴게 사회에 환원한것도 아닌 정부에 넘긴데다가 대학은 박정희가 사학주로 기록되어 있고 박근혜도 이사장을 역임하게 되어 여기저기에서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한국 비료 공장은 1994년 이건희가 다시 다들입니다. 한동한 삼성그룹은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이끌게 되지만 이때 경영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후에 장남 이맹희가 아닌 막내아들 이건희가 삼성의 수장이 됩니다.
1968년 세상이 조금 잠잠해지자 다시 삼성의 수장으로 복귀합니다. 쉬는 동안에 정계진출을 생각해보며 몇몇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냥 포기합니다. 그 대신 언론의 파급력을 알게 되고 비료공장도 넘어갔으니 새로운 사업을 하나 엽니다. TBC동양방송과 중앙일보가 삼성의 새로운 사업입니다. 중앙일보는 현재까지 남아있지만 TBC는 1980년 전두환시기에 언론을 장악하면서 KBS로 통폐합되어 KBS2TV, KBS2FM으로 전환됩니다.
당시 방송계에서는 이병철 회장이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뭐 소문은 소문이지 아는 사람은 없죠. 이병철은 이런 일을 겪는 와중에도 다른 사업을 위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한일은행, 상업은행, 조흥은행 등과 안국화재 동방생명 등을 인수하며 더욱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하고 1966년에는 대한암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합니다.
삼성장학회를 만들고 대구대학과 성균관대학 이사장을 지내며 삼성전자와 전기 등 첨단산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이후부터는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사업을 넓혀가다가 시간은 흘러 흘러 1982년 암수술의 고비를 넘기고 72세의 노인의 몸이 된 이병철은 이제 많이 늙었고 쉴법도 한데 2년전 70세 때 만났던 후지화학의 회장인 이나바 슈조 박사와의 대담 중 나온 반도체에 관한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미국의 반도체 산업 시찰에 나섭니다.
당시의 일본은 첨단산업이 미래라며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우주 해양공학 등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로 경제구조를 변화하던 때 였고 결과가 좋아 외화를 많이 벌어올 때 였죠. 미국에 간 이병철이 본 것은 실리콘밸리의 젊은이들입니다. 만약 이 때 이병철이 반도체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경제상황이 많이 안좋은 나라가 되었겠죠.
이병철은 젊은이들을 보며 반도체 사업 투자를 결심합니다. 이전에도 이건희가 반도체 사업 진출을 위해서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위기 때문에 사라질뻔한 걸 삼성전자가 다시 인수하여 회생하는 실패를 한 번 겪어본적이 있지만 이병철은 지금이 아닌 미래를 보며 한국과 인본의 전문가들을 찾아가 말을 경청하여 얻은 정보로 반도체 산업에 사활을 겁니다.
이때 이미 미국과 일본 업체들이 반도체는 선점을 하였는데 반도체는 사업의 특성상 1등과 2등의 격차도 많이 나고 1등 2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사업이었지만 이병철은 세계1등 수준으로 만들겠다며 사업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진입장벽은 이때까지 다른 사업과는 달리 엄청 높았죠.
최고의 인력들과 최고의 시설을 갖추면서 64K D램을 처음으로 수출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기업들이 가만히 놔둘리가 없죠. 1984년 10월 미국 마이크론사가 64K D랩 가격을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해버립니다. 거기다 일본 기업들까지 가격경쟁에 뛰어들면서 단기간에 30센트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삼성은 첫 수출품이였기 때문에 여기서 지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 20센트까지 내려버립니다.
결국 한해에만 1,300억의 적자를 보면서 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한다고 건의하기에 이르는데 이병철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며 꿋꿋이 밀어붙입니다. 세계적인 반도체 가격경쟁은 이어지고 적자도 쌓이는 와중에 업계에서 기적이라고 불리는 256K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합니다. 86년에는 1MB D램을 개발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선두에 나섭니다. 256K D램 개발 당시 적자를 보더라도 확고한 기술력과 시설이 갖춰진 이상 사업이 궤도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고 생각한 이병철은 더욱 많은 투자를 하고 256K D램 제품은 시장 출시 1년만에 D램 시장의 1/10을 점유하게 됩니다.
이후 제품은 세계 최초 개발이였기 때문에 가격경쟁으로 더이상 삼성을 누를 수 없게 됩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는 이건희때 이르러서는 미국 일본의 선두주자를 추월하고 한국의 1등이 아닌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2004년에는 이 때 만들어 놓은 인재풀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TV와 휴대폰 사업까지 성공하면서 세계 최강자였던 소니의 시가총액을 제치고 한국의 주식은 북한때문에 어쩔수 없이 저평가 된다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에도 시가총액으로만 세계적인 기업반열에 올라섭니다.
삼성을 보고 해외에서 주식투자도 많이 들어오게 되죠. 이병철은 반도체 사업의 기반을 닦은 뒤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합니다. 10년 가까운 투병끝에 1987년 11월 19일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77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호암아트홀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뒤 유해는 용인자연농원 지금의 에버랜드 부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병철의 호는 호암으로 호암재단 홈페이지에 가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이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 멋진 사람이고 멋진 인생이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뒷이야기나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은데요.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을 보면 이병철 회장은 양복도 일반 브랜드 양복이 아닌 도쿄에 있는 개인 양복집에서 맞춤식으로 지은 양복만을 입었고 만년필은 항상 워터맨을 썼는데 수십개를 사서 쓰다가 그중에서 가장 필기감이 좋은 것들만 찾아서 썼습니다.
최고를 고르는데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고 말하죠. 무엇을 하든 무엇을 쓰든 최고가 되고 최고를 쓴다는 철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삼성그룹의 엘리베이터는 탑승감이 좋은 독일재 티센크로프 엘리베이터만 쓴다고 하네요.
죽기 한달 전 카톨릭 신부에게 철학적인 24개의 질문들을 남겼는데 이 질문들이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질문 중에 몇개만 보자면 1번 질문이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13번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단시하나, 24번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등이 있습니다.
사실 모순같은 것들을 교모하게 질문하거나 깊은 질문이 아닌 대부분의 질문들은 모두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고 보이는 질문이 많습니다. 여기까지 삼성 호암 이벼얼의 인생이었습니다.
참조 :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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