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기 전 미국은
정치 경제적인 이유상
한일국교 정상화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권유하게 됩니다.
한일회담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회담의 핵심적인
내용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배상 문제를
매듭짓고 한 일 양국의 국교를 맺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었죠.
1951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은
10여년에 걸친 협상에도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에 이어 장면 민주당 정권도 한일회담을
추진하여 1960년 10월 25일 5차 회담이 열였으나
5.16 군사반란으로 인해
다시 중단되었죠.
5.16은 국가의 자주 경제 재건이라는 공약을
내걸었고 따라서 그들의 군사정권이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경제 건설이
핵심이었습니다
박정희는 군사 정부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 건설의 기초 자금을 마련하고자
한일협상을 다시 추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일 협상의 논점은 식민지배에 피해를
보상하는 '청구권' 문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죠.
박정희는 김종필을 시켜 오하라 일본 외상과
일명 '김종필-오하라 메모'로 무상 3억 달러를 10년간
지불하고 경제협력의 명목으로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로 제공하며 무역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일제 식민지 35년을
배상하는 청구권
협상 금액을 타결합니다.
이 협상에는 '청구권'이라는 명칭이 아닌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협상이 진행됩니다.
박정희는 일본에서 받은 이 돈을 강제 징용자 등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에게는
거의 지급하지 않고
포항제철과 고속도로의 건설 같은
경제 개발에 거의 다 쏟아 넣게 됩니다.
멋대로 '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돈으로 지난 식민지배의 모든 보상 문제를
마무리한 이 치욕적인 협상 내용은 2년 동안
비밀리에 묻혔다가 1964년 들어 그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이 사실을 안 대학생들이
정부에 대해 격렬 시위에 나서게 됩니다.
그들은 매국 정권을 타도하자며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에 이어
경기고와 청주공고에서까지 시위가 벌어지고
전국적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바로 6.3항쟁이며
참여자는 무려
10만여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사태로 번지게 됩니다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하고 언론, 출판을 검열하고
모든 학교를 무기한 휴교시켜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학생 168명 민간이 173명 등
많은 이들을 검거합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되었고
무려 14년을 끌어온 굴욕적인 협정이 그렇게
타결됩니다.
후에 기밀이 풀린 CIA 기밀보고서에는
박정희가 이때 일본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
6,600만 달러를 뇌물로 챙겼다는 문서가
나오기도 했죠.
6.3항쟁 이후 박정희는 정권을 견고하게 만들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일찍이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사태를 보았기 때문이죠.
6.3항생 직후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인혁당 사건'인데
1964년 8월 14일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엎으려고 한 비밀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검거했다고 중정이 발표하게 됩니다
중앙정보는 마구잡이로 고문을 하여
이 청년들에게 간첩누명을 씌워 반국가단체 조직
구성죄로 넘기게 되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검사는
간첩의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기소를 밀어붙이는 중정의 요구에 반대하게
되고 이 일고 좌천을 당하고 결국 사표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중정의 요구에 결국 다시 항소하여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받아낸 한옥신 검사는
승진하게 되죠
양심을 따른 검사들은 좌천되고
정부에 충성하는 검사는 요직에 앉게 된 것입니다
훗날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은
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실토했죠.
이 사건은 6.3 항쟁을 거쳐 학생들과 청년 단체들
등에 반국가 사상을 가진 이들이 섞여 있으며
이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겁을 주고
기를 꺾어 놓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정치, 사회적인 문제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6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의 투자와
발전과 함께 베트남 전쟁의 특수와 현대적인
무장 등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파병 기간은 무려 9년이며
총 32만 명을 파병했고
월맹군 4만 1,000여 명 사살에
참전 결과에 따른 총액은 10억 달러정도인데
미군 봉급의 약 3분의 1을 받으면서
죽어라 싸운 우리의 파병 용사분들은
지금도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허나 이때 얻은 외화로 정권은 많은 재원을
획득했고 참전용사분들의 피 묻은 돈으로
산업화의 길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박정희는 이후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윤보선 후보와 다시 대결하여 승리합니다.
1968년 1월 청와대 코앞까지
북의 무장공비들이
침투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는 큰 충격을 받았고
향토 예비군을 이때 창설하게 됩니다.
이때는 울진, 삼척 등 무장공비 사건이 있었고
지금은 조작이 유력한 이승복 어린이 사건도 있었죠
때문에 반공의 시대였고 아예 국가적으로
철통같은 억압의 시대였습니다.
심지어는 '피카소 크레파스'를 상품 이름으로 만든
박정원씨를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하는 일도 있었죠
피카소가 공산당 활동을 한 적이 있단 이유로 말이죠
영화 타짜에서 주인공 고니도 말하죠
"뭐 박정희야 전두환이야 이렇게 안 되는게 많아"
박정희는 이제 대통령이 아닌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을 또 해먹으려고
3선 개헌안을 밀어붙이게
됩니다.
신민당은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지만
민주공화당은 새벽 2시 30분에 날치기로
개헌안을 통과시킵니다.
이로써 박정희는 다시 대통령을 해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후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식을 가지게 됩니다.
경부고속도로는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발전의 기틀이 비로소 마련된 그의 업적이었고
박정희는 1억 달러 수출을 기념해서
'수출의 날'을 제정한 지 불과 6년 만에
수출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는 71년 김대중 후보를 상대로
7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요.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와 교련 폐지 등의 공약으로
만만찮은 인기를 끌었죠.
박정희는 이때 군중 연설을 하며 말합니다.
"이번이 마지막 출마입니다."
다시는 여러분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상남자 박정희는 이 약속을 지키데 됩니다.
그는 유신으로 인해
국민의 투표권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남자답게 이 약속을 지키게 됩니다.
그는 10월 유신을 발표하고
헌법을 무시한채로
유신헌법을 통과시킵니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한다
-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연장한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고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다.
- 대통령은 긴급초치권 등의 권한을 가지며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및 법관의 임명권을
갖는다.
그야말로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적수가 없는
1인 통치자! 왕이나 다름없는 최강의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74년에는 긴급조치
1호, 2호가 선포되어
유신을 비방하거나 유신에 반대하는 개헌을 주장
하기만 해도 영장 없이 즉시 체포되면
군사재판에 넘겨지고 징역 15년까지 받을 수 있는
공포정치가 실시되기도 하죠.
이후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제명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신시대 최재의 민중항쟁인
'부마항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산대, 동아대, 고려 신학대 등
학생들이 시내로 나가 시위를 하였고
많은 인파가 합류해 5만여 명이 넘는
거대한 시위로 번지며 마산, 창원에서도 이 항쟁에
참여하게 되죠.
이 시기 박정희는 한동안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에서
나라가 주춤하던 시절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경호실장 차지철이 각종 부처에 온갖 갑질을 하던
시절이라 그를 싸고 도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많은 부처에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김재규 중정부장은 박정희가 은밀하게 들려
음주 가무를 즐기던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과
박정희를 암살할 계획을 짜고 이를 실행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0.26사건인데요.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이어 박정희 대통령을
쏘게 되죠. 박정희 대통령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신임했고 같은 동향 출신이며 육사 2기
동기인 가장 믿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
많은 이들을 배반해왔던 그가 결국은 가장
신뢰하던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는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제국군의 장교가 되었으며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사형을 구형받기도
했으며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기도
했고 유신으로 헌법을 무시하고 절대적인
독재자가 되었으며
이를 반대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을 무참하게 탄압하
기도 했죠
남로당 활동같은 경우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한민국 좌파, 종북 이런 부류가 아닙니다.
이렇게 북의 지령을 받아 몰래 활동한다는
이런 허접한 부류가 아니라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의
진정 리얼 오리지널
빨갱이 공산당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참으로 모순적입니다.
침략자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교였지만
일본 패망 후 돌아와 국군의 일원으로써
6.25에서 국가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아예 공산당 빨갱이 출신이지만
이번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국가를 위해 한평생 살게 되죠.
또한 과정에 문제가 있음은 틀림없지만
60~70년대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었고
분명 대한민국의 성장에 기틀을 만든 지도자임은
틀림없습니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며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또는 출세나
권력을 위하여 국가와 조직 동료들을 배반하며
살아왔고 그렇게 결국 한 나라의 최고의 위치까지
올랐지만 최후에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이것은 정치인, 대통령이 아닌
인간 박정희를 볼 때 안타까운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사람은 역사에서 배웁니다.
박정희 같은 사람이 왜 출현했고
어떻게 18년 동안이나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
또 그가 이룩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또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도
왜 많은 국민들이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단순한 기회주의자에
악당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그 점을 객관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참조 : 역사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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