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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노무현, 비운의 대통령이라 불리게 된 이유?

by 아트온다 2020. 11. 3.

대통령이 당선된 시기까지의 노무현은 

인간승리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기대와 지지로 일명 '참여정부'가 시작 되죠

참여정부에서는 우선 정치적이고 권위적인 정부의

정치개혁을 먼저 시행하게 됩니다. 

 

선거법 개정을 통해 비례대표제와 선거공영제가

자리잡게 되었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첫 등장하게 되었죠. 

 

 

또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정당후원회가 폐지되었고

법인이나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가 금지되었습니다

 

노무현은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권위와 기수문화가 자리 잡은 검찰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자리를 만들었으나 

 

 

장차 검찰조직을 이끌어나갈 젊은 검사들은

보수적이고 오랜 조직적 문화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노무현의 과거 청탁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죠. 이 부분은 오히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권위주의에서 

자유로운 그의 정치신념에 부합할 수도 있지만

 

 

서로가 막장스러운 모습으로 국민과 본인, 검찰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사례를 남기게 됩니다. 

 

외교와 국방적으로는 국가의 자주성을 

특히 강조하며 자주국방을 원칙으로 삼고 

미군의 의존도를 낮추며 

 

미군의 의존도를 낮추며 6자회담의 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북한의 위협을 최소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고 

반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죠

 

미국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노무현이 반미사상을 가진

사람이며 미친 사람인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해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후세가 평가해야 할 부분이지만 

노무현은 미국에 대한 의존을 낮추려고 함과 

동시에 실제로 자주국방 부분에 많은 예산과 

심혈을 기울인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과 대화를 시도하면서도

주변국과 관계를 더 친밀하게 개선하고자 하고 

국군의 무장에 많은 노력을 한 것 은 사실입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 방안을

놓고 청와대와 군 당국이 심한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 

 

 

군 당국자들과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

'성우회'는 큰 반발을 하였고 이 때 노무현은

"자국의 군사 작전통제권도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국방장관, 참모총장일며 별 달고 

거들먹거리며 직무유기를 했으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고 

이에 안 그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군 당국자들과 예비역 장성들은 분노를 

표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국가의 안보와 군의 미래를

걱정하며 노무현에게 분노하던 위대하산

군 원로들의 모임 '성우회'의 회장을 지낸 

김상태 전 공군참모총장이 

 

대한민국 2.3급 군사기밀을 미국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에 6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넘겨주고

25억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습니다.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군사기밀을

팔아먹고 간첩질을 하며 개인의 이익을 챙긴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 최고위 군 원로들의 모임인

'성우회'의 회장이었으며

 

대한민국 국군 대장이었던 것이죠. 

 

 

참여정부의 큰 과제였던 부동산 부분에서는

실거래가 신고제와 등기부 기재 등을 도입하여

대한민국의 관행이었던 이중 계약서 부분을 

근절시켰다는 부분에서 큰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참여정부는 투기 억제와 공급확대라는 

일관된 정책을 밀어붙였고 국가가 제제하는

이런 정책은 초기에는 효과를 보았지만

 

참여정부 5년간 아파트값은 엄청나게 폭등합니다

 

 

또한 강남, 강북의 집값이 크게 차이가 나기

시작하면서 양극화 현상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죠. 

 

노무현은 국가가 직접 개입해 투기와 주택가격

안정 대책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억제를 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부동산 시장을 전혀 잡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는 참여정부에서 가장 비판을 받는 내용으로 

뽑히며 그의 최측근인 유시민도 부동산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했죠. 

 

그리고 양극화 문제가 대두 되었을 때 

노무현 정권에 사법제도 개혁의 일환이었던

로스쿨 도입을 진행하게 되는데 

 

이는 사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인

'사법고시'를 후에 폐지하게 됨으로써 

 

 

또 다른 비판을 받게 됩니다. 

 

흙수저도 본인만 열심히 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떤 이 국가고시를 

로스쿨이 대체한다는 것은 많은 논란을 만들었죠

 

경제 부분을 보자면 참여정부의 성장률은 평균

4%대를 유지했는데 이는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의 성장률이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국민소득 수준은 

07년 최초로 2만 달러 이상으로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고 이 시기 한국은 대만을 

1인당 GDP로 추월하게 되죠.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에서 5년 연속 흑자를

이어갔고 수출실적 역시 역대 정권 중에 최고치를 

기록하게 됩니다. 

 

 

나쁘지 않은 경제수준이었지만 앞서 말한

내부적으로 부동산 투기의 극성과 

국민의 양극화 등의 문제도 분명 있죠

 

또 이명박 정부 때 체결된 여러 FTA는

참여정부 시기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미래를 대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노무현은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긍정적인 평가도 많았기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의 진짜 문제는 바로 '정치'였습니다. 

노무현은 자신의 신념과 정치 관념이 확실한 

사람이었지만 정치적인 '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노무현이 집권하고 곧장 '대북 불법 송금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북에 국가가 직접 나서 몰래 돈을 

송금했던 사건으로 이 사건의 여파로 현대가문

정몽헌 회장이 자살하는가 하면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 국정원장, 경제수석 등 

모두 구속되었죠. 

 

 

노무현은 이 사건의 특검안에 대해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특검을 수용합니다. 

 

 

노무현은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건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전 정권의 실세들을 구속하는 선에서 

특검 연장을 거부하고 적당히 마무리 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대중 계열의 동교동계와 친 DJ계의 

호남 기반 민주당의원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아주지 않아 이 치부가 

드러나게 된 것을 빌미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입원하고 화병이 났다고 

메시지를 측근들에게 보낼 정도로 불화가 생겼죠 

 

사실 잘못은 지들이 다 해놓고선 순식간에 

친노계열과 동교동계, 친DJ계열 인사들이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 불화가 얼마나 극심했는가 하면 그의 임기중

발생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나왔을 때 오히려

가장 앞장섰던 것은 같은 민주당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동교동계와 호남기반 DJ 인사들이었죠

 

또한 노무현을 대통령 뽑아서 죄송하단 폭언을

하는가 하면 훗날 노무현이 이명박 정권에서 

검찰수사를 받을 때 노무현을 철저하게 수사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죠

 

노무현은 정치적인 센스를 발휘하지 못하고 

정국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데에 사실 본인도 

일조했습니다. 

 

 

가뜩이나 집권 기간 내내 한나라당과 언론의 

공격을 받는 처지인데 물론 이유야 있었다지만

"전라도 정치인들하고 정치 못해 먹겠다"라는

폭탄 발언을 하며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죠

 

노무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방이 온통 적이었다

는 겁니다. 사실 노무현의 탄핵은 국민의 여론이나

뜻이 조성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노무현 탄핵은 그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사람들과

야당 모두 합심해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한

노무현 개인에게는 정말 충격적이고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물론 탄핵이 선고되지 못하고 그는 집권자의

자리를 지키지만 이미 여, 야 모두가 그의 적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친노세력들은 동교동계보다 

민주당 내에서 그 지지기반이 미약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에 열린우리당 염동연 의원이 

노무현 정부가 호남을 홀대한다는 

호남홀대론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호남 인사를 굉장히

우대한 편이었습니다. 

 

놈현 정부 4대 권력 기관장 등 핵심인물 106명 

가운데 호남 출신 인사가 31명으로 역대 정부 중

김대중 정부 다음으로 가장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교도계와 호남 DJ계 인사들이 

친노계열과 등을 돌리게 되고 훗날 안철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새정치민주연합과 갈라서 

국민의당으로 분리되면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사실상 국민의당이 전라도의 표를 

싹쓸이하게 됩니다. 

 

김대중과 동교동계 또 호남 인사들이 노무현과 

친노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지요. 

 

 

대북불법송금 사건은 이처럼 노무현과 대한민국 

정치사에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외로운 길을 걷게 되었고 

정권 내내 여, 야를 가릴 것 없이 지속적인 공격을 

받게 되는데 언론까지 가세해 무슨 일이든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죠

 

 

노무현은 집권 후반기 10%대의 씁쓸한 

지지도를 계속 기록하게 되고 

다음 대선은 이명박이 정동영을 누르고 

압도적으로 당선되게 됩니다. 

 

노무현은 집권 기간 동안 국민의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희한하게도 그가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평범한 시민으로서 내려오게 되자 

 

그의 인기는 엄청나게 상승하는 황당한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봉화마을로 내려와 친숙하고 푸근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행보에 많은 국민들이 

열광하게 되죠. 

 

 

사실 그를 조롱하고 놀림감으로 만든 것은 어찌

보면 국민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정작 대통령을 할 때와는 다르게 

평범한 시민이 된 그는 많은 존경과 지지를 

받게 되었죠. 

 

집권자일때는 그렇게 해도 안되던 것이 

대통령에서 내려오자 많은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노무현 본인도 전국에서 봉하마을을 찾는 관광객

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대통령 시절에는 욕하던

사람들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죠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게

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게 됩니다. 

 

노무현의 형인 노건평과 서갑원, 이광재, 강금원,

권양숙 등이 조사를 받게 됩니다. 

 

 

노건평이 돈을 받아먹은 사실은 확실하고 

노무현 역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친족, 측근 비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노무현의 딸 노정연 역시 40만 달러에 13억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받았죠

 

 

이때 노무현의 변호를 맡은 사람이 바로 

문재인 현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 수사 중 계속 노무현 본인의

결백을 주장했고 경찰은 정황증거와 박연차의 

자백 진술 등을 토대로 노무현 대통령에게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은 고향에서 투신자살하였고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는 종결되었습니다. 

 

 

대통령직을 맡았던 사람이 스스로 자살한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많은 슬픔

속에서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지게 됩니다. 

 

노무현은 집권할 때보다 퇴임하고 나서 또

퇴임하고 나서 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더 많은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희한한 케이스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노력하여 

고졸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많은 인권 활동과 노동운동을 하고 

국회의원이 되는가 하면 소신 있는 정치 행보로

대한민국 정치인 최초로 개인 팬클럽인

노사모를 창설시키기도 했고 노풍을 일으키며 

대통령까지 당선되어 그야말로 인간승리의 

표본을 보여준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대통령으로서 삶은 불행했습니다. 

 

 

그는 약삭빠른 정치인으로서의 센스가 없었고 

국민의 지지가 곧 자신의 기반이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그가 정치를 내려놓은

다음에서부터야 국민의 지지와 존경이 그의 힘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자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역시 측근과 친족의 비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집권 기간 내내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신 있는 집권 활동을 

보여주었고 많은 언론의 자유와 집회를 보장했고 

 

높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적 가치에 큰 공헌을

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사병 만기 전역자 

출신 대통령이기도 하며 그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국민들에게 가장 인간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바로'라는 별명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냥 바보락 아니라 큰 바보였습니다. 

대통령으로서는 불행했지만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대통령

노무현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대한민국에 그가 말한

진정한 '사람 사는 세상'이 찾아왔을 때

그가 미소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조 : 역사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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