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5, 6, 7, 8, 9 대통령 박정희!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도 반역자로도 불리는
바로 그 인물!
그는 영웅인가? 단순한 기회주의자인가?
박정희는 1917년 일제강점기에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빈농 집안 출신으로 별 탈 없이 성장하다가
구미 보통학교, 오늘날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박정희가 살던 마을에서 보통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사람은 박정희와 셋째 형인 박상희뿐이었다고 합니다
형 박상희와 박정희만이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박정희의 생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이 셋째 형 박상희는 학력이 구미 보통학교가
전부였지만 동아일보의 지국장이었으며 나름대로
지방의 엘리트였습니다.
박정희는 우수한 성적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집안 사정상 더 공부하기 힘들었지만
형 박상희의 지원과 격려로 학비가 들지 않는
대구사범학교로 진학해 교육을 받습니다.
박정희는 시간이 지나 강점기 하의 학교 선생인
훈도로 임명되어 재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군인이 되고 싶어 했으며
훈도로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생도들보다 많은 나이가 걸려
일본육사는 힘들다고 생각했고 상대적으로
입학이 덜 엄격한 만주 군관학교를 목표로 하게되죠
이 과정에서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적은
혈서를 만주로 보냈다는 동료 교사 유증선씨의
증언도 있습니다만 이는 거의 6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뒤 나온 증언이라 확실한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주의 신문에 이 일화가 실린 적도 있다고 하는데
많은 사실 논란이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안정적인 직장인 훈도 직을 버리고
만주로 가게 된 그는 대구사범학교의 교련
주임이었던 아리카와 대좌의 추천으로
대부분의 생도가 10대 후반이었지만 23세의 나이로
만주군관 학교에 2기생도 15등으로 합격하게 됩니다.
그는 창씨개명도 하게 되는데요.
이름을 다카키 마사오로 바꾸게 됩니다.
박정희는 이제 보통학교의 교사에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으로 변신하게되죠
만주국은 영화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푸이황제가
일본의 꼭두각시 집권자로 있던 정권으로
실제로는 일본의 관동군 즉, 중국 침략의 첨병으로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의 사령관이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는 허수아비 괴뢰 정부였습니다.
박정희는 타고난 군인 체질이었으며
성실하고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혹독한 생도 기간을 거치고 15등으로
입학했지만 2기에서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이 만주군관 학교에는 훗날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정일권(5기), 6.25의 영웅 백선엽(9기) 등등이
나오기도 했으며 만주군관 학교 출신의 선후배들은
훗날 5.16군사 반란이 일어날 때
많은 수가 주체로 참여하게 됩니다.
박정희는 뛰어난 성적으로 이제는 본토의 일본육사로
편입해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고
조선인 중 유일하게 일본 교육 총감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박정희는 확실히 성실한 성격이고
타고난 군인으로서의 자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졸업 후 일본제국군 소위 다카키 마사오로서
정식 임관하게 됩니다.
그는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인들이 말하는
'황군'의 정식 장교로 임관되면서 평생에 걸쳐 그를
따라다니는 반민족 친일부역자의 꼬리표를 달게
됩니다.
박정희는 왜 훈도 직을 버리고 군인이 되려 했나?
라는 질문에 긴 칼 차고 싶어서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긴 칼이란 권력과 힘을 말하는 것인데
그 당시 일본군의 장교란 그 위세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가 된 후 만주에서 복무했는데
당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을 주로 상대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주에서는 조선의 항일 무장 단체들도
있었는데 박정희가 이들을 상대로 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설이 있죠.
하지만 박정희가 조선독립군을 상대로 직접 전투를
벌였다는 확인된 공식 문서는 아직 없습니다
그 후 위풍당당했던 일본제국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는 얼마 가지 못하고 일본의 패배로
인한 항복으로 광복 후 초라하게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박정희는 1946년 다시 처음부터
이번에는 다카키 마사오가 아닌 박정희로서
조선경비사관학교 육사 2기에 입교하게됩니다.
이때 그의 나이 29살!
훈련생 중에서 굉장히 많은 나이였죠.
이때 대한민국의 정국은 총파업사태에 이어
'대구폭동'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대구지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미군정과
경찰에 대항하는 격렬 시위는
성주, 고령, 영천 등으로 퍼졌고
경남과 전남, 전북 등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의 고향인 선산지역도 예외는 아니었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군중들과 이 항쟁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게됩니다.
박상희는 박정희의 단순한 형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박정희가 가장 따랐던 인물이었습니다.
형의 죽음에 박정희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정부에게 형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가지게 됩니다. 그후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난 후 박정히는 남로당의 권유를
받게 됩니다.
남로당은
남조선로동당인데
남한의 공산주의
정당이었습니다.
그들은 박정희를 포섭합니다.
박정희는 빈농 출신으로 형의 죽음 때문에
정부에 원한이 있었고 군 내부인사를 포섭하기에는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남로당의 군사 총책이 된 박정희는
남로당원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제주 4.3사건 이후
군 내부의 좌익 세력 숙청을 계획해 오던 군은
박정희를 체포하고 군내 남로당과 좌익 인사들을
색출해 내기 시작합니다.
이때 박정희는 내내 얻어맞다가 남로당 내
자신이 알고 있는 인사들을 모두 불어버리고
용서를 구했고 미련없이 조직과 동료들을
배신한 후 육본 정보국장 백선엽의 도움과
군내 옛 만주 인맥들까지 나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박정희는 동료와 조직을 배신한 선물을 받았고
형집행정지에 석방이라는 보너스까지 받게 됩니다
박정희는 남로당 좌익 경력 때문에 5.16군사 반란이
성공하고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미국에게 지속적인
의심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보다도 더 철저하게 반공을
내세우고 자신의 경력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석방 후 박정희는 소령직을 파면당하고
야인이 되었으며 그 와중 모친이 돌아가시는
일까지 겪게 됩니다.
그러나 백선엽의 배려로 군의 문관이 되어
급료까지 지급받고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게 되죠
박정희는 훗날 자신을 구해준 은인인 백선엽에게
자신의 집권 기간 내내 그 은혜를 갚습니다.
여러 나라의 대사와 장관, 국영 기업체 사장직을
두루 맡기며 백선엽에게 보답하게 됩니다.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다시 군에 정식 복직하게
됩니다. 사실 6.25는 친일 전력이 있던 일본군 출신자
들에는 오히려 기회였습니다.
백선엽, 정일권, 박정희, 김백일 등 일본군 출신들은
실제로 큰 공들을 세웠고 일본제국군에서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이들은 독립군 출신 군인들보다 더
크게 활약하게 되죠.
본디 철저한 군인 체질에 성실하고 우수한
인재였던 박정희는 6.15가 끝나고는 서서히
진급하여 장군이 되어 있었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제2공화국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장도영, 박정희와 육사 8기, 해병대 등이
주축이 된 군부 세력의 쿠데타로 인해 2공화국은
9개월 만에 무너졌고 정국은 군부 세력이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됩니다.
군사 혁명위원회를 만들고
이를 재편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발족하죠.
5.16은 박정희와 육사 8기 세력들이 주도했지만
실제로 병력을 이끌고 앞장선 것은 장도영파와
육사 5기생들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이들을 대우해 주는 척 하다가
내각 수반인 장도영이 민간 과도정부에 정권을
넘긴다고 멋대로 발표하자
'반혁명 사건'으로
장도영과 육사 5기생들을
숙청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된 박정희는 육군 대장으로써
군을 전역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박정희의 적수는 앞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후보였는데 15만표차로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박정희는 이로써 대한민국의
5대 대통령이 됩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진심으로
드라마틱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빈농 출신에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장교 후보생으로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편입해
일본제국군의 소위로 임관하였지만
일본의 패망 후 다시 돌아와 장교로 임관하였고
공산당 좌익활동을 하다가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공산당 조직과 동료들을 배반하고
많은 이들의 구명 활동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이후 6.25가 터져 다시 군으로 복직되어
전쟁이 끝나고는 장군이 되었고
좌익활동을 한 전력에 따른 미국의 의심에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내세워 위기를 넘깁니다.
이후 정적인 장도영과 육사 5기생들을 숙청하고
대장으로 전역 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침략자이며 국가와 민족의 원수인
일본제국군에 본인 스스로 지원하여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장교가 되었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돌아와
6.25에서는 조국을 위해 싸우게 됩니다.
그는 남조선로동당 좌익활동을 하며 군사 총책을
맡다가 검거되어 사형을 구형받는 등
진정한 원조 종복세력이라 할 수 있지만
훗날 반공을 국가의 제1국시로 내세우는 철저한
반공의 투사가 됩니다.
박정희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자신의
야망과 출세를 위해 그가 말한 대로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군의 긴 칼을 차기도 했고 빨갱이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조직과 동료를 배신하고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결국 박정희는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됩니다. 이 때문에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서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족반역자이면서도 민족을 위해서 싸웠고
공산당과 좌익활동을 하다가도 훗날
철저하게 반공주의자로서 활동했기 때문이지요.
누군가가 항일 독립운동을 하며 죽어라 싸우고
있을때 침략자들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의 군대의 장교가 되었고
빨갱이들이 온 나라 안에 잠입해 있을 때
그 빨갱이들의 군사 총책으로 활동했지만
박정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국가 전체의
대표자인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집권은 무려 18년 동안 이어지게됩니다.
참조 : 역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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