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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제주 4.3사건의 실체?

by 아트온다 2021. 1. 11.

 

 

 

이승만을 설명함에 있어 제주4.3사건과 여수사건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죠. 

 

제주 4.3사건과 여수사건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과정에 있었던 가장 아픈 사건입니다. 

 

제주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요. 제주도는 남로당과 사회주의자들이

매우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이승만편에서 

말했던 현상유지 정책을 폈고 친일출신 경찰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경찰 같은 경우 치안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러나 미군정 같은 경우에는 세세한 부분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민 감정을 제대로 파악을 못했던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군사기지로 

사용되었으며 미군에게 폭격을 당하기도 했죠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 있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제주도로 들어 옵니다. 

 

전국적인 기근과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까지 

겹치면서 제주도는 최악의 상황에 빠집니다. 

 

남로당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기 시작하죠. 

 

제주도의 인구는 30만명정도로 파악이 되는데요. 

4.3사건 발생 당시 6~7만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3.1운동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리면서 당시 대규모 집회 행렬이

모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좌익 남로당이나 

민전이 동원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는 

것입니다. 

 

미군정은 사전에 이들이 집회를 여는 것은 

허가했지만 이들이 행진하는 것은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기념식을 마친 군중은 가두시위에 들어가고

이때 기마 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채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기마 경찰은 이를 

몰랐는지 그냥 가려고 하자 사건이 터졌습니다. 

 

화가 난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분노하며

경찰서까지 달려드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경찰은 이를 습격으로 오인하여 발포를 합니다. 

 

이 사건으로 6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발생하죠.

 

제주의 민심은 최악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응원 경찰이라는 내륙 경찰들이 증원되고 

 

 

이런 갈등 속에서 3월 9일 제주도 총파업사태가

일어나고 제주도의 기능들이 마비되자

미군정과 경찰은 지속적인 탄압을 전개합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무장봉기가 일어납니다

 

이제 제주 4.3사건이죠.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가 공격당하고 

경찰과 우익인사들 중에서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인원은 대략 350명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경비대에는 토벌 명령이 내려왔지만

당시 9연대의 책임자 김익렬 중령은 

평화적으로 해결을 보고자 했죠. 

 

결국 남로당원이며 무장대의 대장인 김달삼과

합의를 봤지만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이 터지며

진전을 보지 못하는데 김익렬은 경찰때문에 

일이 커졌다며 항의하지만 이로 인해 빨간분으로

몰려 버리죠. 

 

결국 지휘관을 교체하고 박진경 중령이

9연대장으로 부임합니다. 

 

박진경은 무장세력을 폭동으로 간주하고 

강경 진압을 밀어붙이지만 6월 초에 이를 

반대하는 부하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이는 군부와 미군정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었고

제주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두가 알게 되었죠. 

 

문제는 4.3사건은 분명하게 단순한 도민들의 

분노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남로당이 계획적으로

일으켰고 경찰과 우익인사는 물론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의 가족들까지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장봉기 자체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무장봉기 세력들은 진압을 피해 제주도 산속이나

깊은 동굴로 들어가게 되는데 정부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 14연대를 출동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4연대의 군인들은 부당한 명령이라며

명령을 이행하지 않습니다. 

 

즉, 항명이 일어난 것이죠. 

 

지창수와 김지희를 중심으로 

우리는 동족상잔을 일으킬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역시 남로당 산하의 구성원으로

실상은 제주도의 봉기와 같았죠. 

 

이들도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남한의 단독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와해시키려 한 사건입니다. 

 

우선 명령을 거부한 '제주 토벌 출동 거부 병사

위원회'의 호소문을 한번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를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국 즉시 철퇴

 

언뜻 보기에는 애절한 호소문이며

실제로 군인의 정신과 부합하는 대의명분이라고

착각할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죄 없는 국민을 탄압하길 거부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는 부적절한

명령을 거부한 것처럼 호소문을 발표했기 

때문이죠. 

 

봉기군은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군중들을 선동해 경찰서와 행정기관 등을

장악했는데 이때 좌익 인사들에 의한 

인민의원회가 구성되었죠. 

 

 

여순사건에서 진압군에 의해서 일어난 피해를

부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반란군의 짧은 점령 기간 동안 경찰이나

우익인사를 비롯해 그 가족과 일반 민중 등

점령군과 군중들에 의해 일어난 학살도 분명

있었습니다. 

 

10월 20일 인민대회를 거쳐 인민위원회가 만든

6개 항의 결정서를 확인해 보죠. 

 

1.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4.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5.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6.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1번은 '여수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맘대로 행정을

총괄하겠다' 말하고 있죠. 

 

3번은 대한민국을 분쇄하고 

4번은 모든 대한민국 법은 무효이며

6번은 북한에서 먼저 했었던 일이죠. 

 

2번은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쓰여 있는 곳도

있는데 여수지역사회 연구소 공식 홈페이지를

인용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4.3사건과 여수사건의 주체는

남로당 인사들의 직접적인 무장봉기라는 겁니다.

 

이후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이루어지고

이에 반란군의 주력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죠.

 

이런 와중, 앞서 20일 인민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토벌군에게 좌익 색출 과정에서 학살당했습니다. 

 

 

골수 남로당 인사들 말고도 이 대회에 참가한

일반 민중까지 죽임을 당하는 참사가 일어나죠. 

 

산으로 들어간 반란군과 추종자들 역시 엄청난

숫자가 죽임을 당하는데 일부는 한국전쟁까지

남아 흔히 말하는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됩니다. 

 

제주도와 여순사건은

그 주체가 남로당이며 

남로당은 어디까지나 남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여 북한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 

그 목적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두 사건이 남한 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진압 작전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저들의 목적이 대한민국 정권의 타도와 

사회주의 국가의 수립인 이상 이것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죠. 

 

 

 

1948년 11월 17일 제주 계엄령이 선포되며

무자비한 초토화 토벌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이 작전으로 대부분의 무장대가 괴멸되었으나

엄청난 수의 일반인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1949년 7월에는 대부분의 무장대 토벌에

성공했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후인

1957년 9월에 완전히 끝나게 되죠.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발표한 날은 

1948년 8월입니다. 만약 정부가 반란 세력들을

강경 진압하지 않아 제주도와 여수가 남로당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부 수립 이후로 지하로 들어간 각지의 남로당

세력들이 자신감을 얻고 전국적으로 봉기했을 

겁니다. 

 

 

이런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점도 중요하죠. 

 

심지어 박헌영은 훗날 공개된 옐친 문서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 내 20만 남로당원들이

일제히 봉기할 것이라고 말한 발언이 공개됐는데

 

이런 걸 보면 이게 헛소리가 아닙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만약 전쟁 중에 터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한국전쟁 당시 남로당의 무장봉기가 거의 일어나지

않은 것은 1950년 초까지 대부분의 좌익세력에

대한 토벌을 끝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군 내부에도 얼마나 많은 좌익 인사가 

침투해 있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며

박정희 전 대통령조차도 군내 대대적인 좌익

색출작업에 걸려 죽을 뻔했죠. 

 

우리는 이 사건들의 진실을 봐야 합니다. 

물론 국가도 잘못을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와서 

노무현 대통령은 4.3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를 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4.3사건 희생자

추념 행사에 참여하여 희생자들의 보상에 대한

입법과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무리 국각를 전복하려는 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라지만 그 사이에 수없이 많은 인권유린과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 부분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도 똑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권유린과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자가 있다 해서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세력들의

행위들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주도와 여수 순천을 진압하지 못해 

그곳이 남로당의 해방구가 되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할까요? 

 

저런 걸 가만히 두면 그게 국가입니까? 

 

프랑스가 민족반역자 청산을 하면서 

엄청난 수의 무고한 시민과 과도한 처벌을

받은 피해자가 나왔죠.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프랑스의 반민족 처벌에 열광하면서 

 

이런 부분은 언급하지 않아요. 

 

독일군 머리를 깎아준 이발사도 

거리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그랬는데...

 

프랑스 내에서도 반민족 처벌에 큰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40%이상 나오는

판인데 말이죠. 

 

 

 

심지어 드골과 법무장관 드 망통도 이 부분을

인정했죠. 그렇지만 '이건 꼭 필요했다'라고 말했죠

 

반민족 처벌을 함에 있어서 법에 의거하지 않은

개인적인 복수나 무고한 피해자, 말도 안되는

과도한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나왔지만 그렇다 해서 대독 협력자를 처벌한다는

법과 의의, 이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민중항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두 사건은 예컨대 5.18 광주항쟁과는 그 결이

다르다 이겁니다. 

 

 

이 두 사건은 분명하게 국가전복을 위한 

남로당 주도의 무장봉기와 그들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는 겁니다.

 

제주도에서 봉기를 일으켜 이 수많은 비극을

만든 당사자인 김달삼은 정작 제주도를 

탈출해서 나가죠. 

 

 이 사람은 나중에 죽는데 

북한의 현충원인 애국렬사릉에 무덤까지 있어요. 

 

3.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걸 그냥 두면 그게 나라냐 이거죠.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이게 뭡니까? 

군과 좌익인사들이 합세한 여수 인민위원회에서 

있었던 결의잖아요. 

 

이걸 어떻게 그냥 두냐고요. 

 

이게 민중항쟁이라는 분들에게 묻겠는데

그럼 당신들이 원하는 게 대체 뭡니까? 

 

그럼 당시 정부가 이거 숭고한 민중의 요구

6개 항을 받아들여야 했다는 거에요?

 

제주 4.3과 여순사건이 민중의 항쟁이면

국가가 나서서 이 사건을 항쟁이라 

명명했겠죠. 

 

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이 그게 아니기 때문에

이게 사건인겁니다. 

 

남로당이 주도하고 일으킨 사건이 맞는데

그 사이에 있었던 불행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 사건 자체를 숭배할 수가 있습니까? 

 

이 사건으로 그래도 가장 중요한 점 

1950년 초반까지 대부분의 남로당과 좌익에

대한 색출과 토벌을 끝냈기 때문에 

 

실제 한국전쟁의 과정에선 이들에 의한 

봉기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군 내부에서 색출 당한 사람이 

4,000여명이 넘어죠. 

 

이 사람들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6.25터졌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이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나 인권유린

부분은 분명이 국가가 사죄해야 하고 

실제로 그에 대한 부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의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굉장히 복잡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두 사건은 남로당원들이 일으킨 무장봉기

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출처 : 역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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