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보다도 훨씬 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875년은 일본의 조선 침략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해였죠.
이승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가게 되었고
쭉 서울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성장하여
과거 시험을 준비하게 되는데
이 당시의 과거제도는 일반 평민이 합격하기
굉장히 어려웠고 그마저도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죠.
모든 걸 과거에 매달렸던 이승만은 이후
'배재학당'에 들어가게 되는데 배재학당은
시인 김소월, 학자 주시경 등 유명한
인사들이 거쳐 간 곳입니다.
배재학당에서의 교육과 인맥은
이승만의 인생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데 조선이라는 나라의 틀 안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 생각했던 인물에게
영어, 서양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사상과
기독교적 사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는데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조선의 무능을 비판하기도 했고
독립협회는 민중의 권리와 참정권,
국가의 자주성 등을 부르짖으며 사회의 개혁과
계몽 운동을 전개하던 단체였습니다.
1890년대는 조선이 아직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시점이 아니었지만 이미 조선, 대한제국은
정상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당연히 민중의 권리와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독립협회는 고종이나 조선 왕실
보수파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도 일단 왕실의 권위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도 이때 잡히게 되는데
그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나중에 출간되고 물론
일제 강점기 내내 금서로 지정됩니다.
이승만은 1904년 8월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미국으로 가게 되는데
대한제국의 대신이었던 민영환과 한규설의
부탁으로 밀서를 가지고 조국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죠.
단순히 뛰어난 인재일 뿐만 아니라
이제 영어를 할 수 있으니까
이점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미국으로 간 이승만은 존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기도 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잠깐 만나기도
하며 외교활동을 폈지만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
1905년 대한민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만을 지원해주던 민영환은
자결하게 되죠.
사실상, 이 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는 간판뿐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석사과정에 들어갔지만,
석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프린스턴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후
1910년에 추가과정 이수를 통해 하버드 석사를
따냅니다.
이승만은 이후 10월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미 조국은 경술국치로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후였죠.
현대인들이 정확하게 체감을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당시 미국 유학에 하버드, 프린스턴 등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의 경력은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추앙을 받았습니다.
서울과 지방을 돌며 강연을 하고
YMCA등에서 엄청나게 많은 청년들이 몰려
그의 인기와 명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적 강의와 민족주의적 사상을
조금씩 섞어서 강의하던 그에게
점점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고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고
세계감리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한다며
다시 조국을 떠나게 됩니다.
여기까지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승만은 서방의 신식교육을 배운
과거의 구시대적, 전통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세계감리교 평신도대회가 끝나고
딱히 활동할 근거지를 찾지 못했는데
그때 과거 수형생활에서 형제 같은 친분을
쌓은 박용만의 권유로 하와이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하와이는 한인 노동자 교민사회가 활동하고
있었고 박용만은 이미 이곳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만들어 놓았던 사람입니다.
박용만은 철저한 무장투쟁론자였는데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미국본토의 가장 핵심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해방 전 내내
'외교독립론'을 밀고 나갔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역만리 땅에서 병력을 양성해
공격을 준비한다는 박용만의 생각과 대립했고
독립은 약간의 병력을 양성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안에서
그들의 힘을 빌려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용만은 이승만이 교민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나
이승만은 차근차근 교민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며 세력을 불려 나갔는데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에 속한
교민들이 낸 성금을 자신에게 직접 전달하게 하고
학생 기숙사와 땅을 자신의 명의로 하는 등
더는 박용만도 참을 수 없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결정적으로 1918년 대의회
회계감사에서 장부상 여러 가지 부정행위가 나오게
되어 감정의 골이 폭발하게 됩니다.
이승만 측은 명확한 해명을 하지 않고
결국 조사원들과 이승만 세력 간의 유혈
사태로까지 번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승만 본인이 이들을 하와이 경무청에
폭행죄 등으로 직접 고발하는 가 하면
이들을 '박용만 패당'이라고 직접 언급했고
이들은 미국 땅에서 한국군대를 만들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를 해치려는
자들이라 증언함으로
이것은 먼 타지에서 배일 활동을 하는 한인들을
같은 한인의 지도자급 인물이 직접 나서
비난함으로써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박용만과 그 지지 세력들은 분열하여
나가고 하와이 교민 사회 역시 분열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이런 사건들로 하와이지방총회를
장악하게 됩니다.
1919년 3월에는 역사적 사건인 3.1운동이
있었고 이승만은 3월 10일에서야 이를
듣게 됩니다.
이후 4월에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에 참석하는데
이 비슷한 시기에 우리 대한민국에 있어
근간이 되는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자신이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때는 아직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시기는
아니었고 국무총리의 직함을 받게 됩니다.
4월 23일에는 한반도 본토에서 임시정부, 일명
한성정부가 선포문을 발표했는데
이 정부 조직의 직책도 이승만을 일인자,
'집정관총재'로 삼았습니다.
어느 곳이든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일인자
아니면 임시적 이인자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걸 보면 당시 이승만이 어떠한 위치였는지
알 수가 있죠?
1919년 9월에는 상해에서 각각의 임시정부들이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협의하지 않고
'구미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사실 이는 이승만이 독단으로 설치한
기구였고 미주지역에서 받는 재정까지도 귀속된
부처라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갈등이
변격화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와 전문으로 소통했는데
아무래도 이런 방식은 좀 문제가 있죠?
이승만은 상해로 떠났고 12월에 도착하게 됩니다
임시정부에는 '무장투쟁론자'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또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인사들
역시 굉장히 많았죠.
특히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주장했던
사람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사상적 체계를
우선하는 이승만과는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는데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대놓고
대통령에서 물러나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승만은 특히 재정 부분을 양보하지 못했는데
임시정부의 애국금, 성금 등과 미주지역의
성금까지 모두 장악함으로써 감정과 갈등이
폭발하게 됩니다.
상해 생활에서 답답함과 염증을 느낀 이승만은
1921년 임시정부의 대표로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여하게 되고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했지만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집단이 아니었기에
본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그의 외교독립론을 적절히 수행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였는데 그는 상해로 복귀하지 않았고
결국 1925년 3월에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합니다.
이승만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재미 한인사회의 지원은 끊고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이승만은 철저하게 보스기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승만은 남 밑에서 일할 사람이 못되고
무조건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이 주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스타일 때문에 이승만은 가는 곳마다
갈등과 분열을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인정을 받았고 반대로
많은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데
임시정부를 김구가 주도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1922년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고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했고
여기서도 독립문제를 정식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정식 의제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당시 강대국들은 극동에서 소련의 입지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었죠.
이승만은 소련에 직접 부탁하기 위해
소련으로 가기도 했지만 도착하자마자
추방당하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은게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그의 반려자인
프란체스카를 만났고 이듬해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터지게 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승만이나 독입운동가들
입장에서는 미국이 무조건 이겨야만 했고
이승만조차도 무장투쟁을 준비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게 한인들을 훈련시켜
첩보 수집부대 창설을 건의 하기도 했고
일본인 2세들로 구성된 부대들과 같이
미군 소속이면서 한인들로 이루어진
부대 창설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또 임시정부의 정식승인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전쟁끝까지 임시정부는 정식으로
승인되지 못했죠.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는 드디어
"적절한 시기에 적법한 절차를 거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는
발표가 나오는데 물론 적절한 시기라는 것은
매우 불확실한 말이지만
이 발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모두에게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드디어 항복함으로써
우리는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일리가 있는
하나의 계파였고 나름의 활동을 했지만
사실 큰 효과를 볼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무장독립론이나 기타 다른 계파들의
활동도 그것이 조국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죠.
대한민국의 비극은 이렇게 찾아오게 되는데
우선 해방 후 스스로 자립하고 이끌어 갈만한
명분과 확실한 세력을 갖춘 집단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프랑스는 사실 나치독일에 점령
당하고도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가 연합국의
분명한 일원이었죠.
또한 자국내에서도 거대한 세력의 저항 조직
레지스탕스가 있었으며 사실 이들도 미국과
영국, 소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해방을
맞이할 수가 없었지만
자유 프랑스는 연합국 내에서 분명한 인정을
받았으며 실제로 미국의 배려로 가장 먼저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해방군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낭만과 상징성을 위해
한 일이었지만 프랑스인들에게 대표적인
감격의 순간으로 뽑히죠.
프랑스는 전후 문제를 해결하고 주도하는 데에
분명한 명분을 가진 세력이 있었으며
승전국의 입장으로 국제사회에
영국과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주체적
세력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반도는 이미 이 시점 해방을
스스로 쟁취하지 못했고
이 해방을 가져온 국제사회의 세력에게
인정받은 '정부'가 없었다는 것,
이것은 해방 후 엄청나게 많은 세력과 이념,
계파적 갈등, 싸움을 만들게 됩니다.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여운형'이었죠.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일명
'건준'이라 불리는 단체의 위원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 소 양국은 한국을 당장
독립시킬 생각이 없었고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들어오게 되는데 대의적인 명분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였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임시정부를 계승한 국가임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죠?
그러나 이 시점 임시정부는 한반도 밖에
있었고 그 적통을 인정하지 않는 또 다른 새로운
국가 건국을 위한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해방 후 새로운 국가를 주도하는 것은어떠한
명분이나 강력한 세력이 따로 없었음을이
건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건준은 좌, 우가 모두 속해 있는 집단이었지만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이 중심이되어갔고 건준은
'조선공산당'이 일선에 나서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자신들 멋대로선포한 것은
역사에 남을 그들의 실수이며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였습니다.
이는 다른 우익, 민족 진영이 참여하지 않은말
그대로 자신들 멋대로 새로운 국가설립을선포한
만행이었으며 발 빠르게 자신들의
정치적주도권을 먼저 만들어 놓으려는 계략이었고
또 많은 참여 인사들이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집단이었습니다.
참조 : 역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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