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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무현이 남기고 간 것, 고졸 출신이 대통령이 되기 까지

by 아트온다 2020. 11. 2.

노무현은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대창 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로 진학합니다.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던 학생이었지만 

집안이 어려워지자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부산상고로 진학했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담배를 접하며 비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하죠

 

그는 자서전에서도 자신은 상당히 반항적이었으며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했죠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과 사시 공부를 

병행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60년대 당시는 고졸의 학력도 절대 낮은 학력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엘리트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군을 전역하고 1972년 권양숙과 결혼하였고

1975년 30세에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합니다. 

 

 

노무현은 17회 사법시험에서 단 한 명뿐인 

고졸 합격자였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이 당시 사법시험은 굉장히 적은 숫자를

뽑는 시험으로 합격자는 겨우 60명, 그중

절반 이상이 서울대 출신이었고 명문대인 연세대도

겨우 1명의 합격자를 배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연수원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겨우 5개월만에 사직하게 됩니다.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세무, 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고 요트를 타며 그럭저럭 살만하게

된 그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는 김광일 변호사를 

만나게 되고 1981년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되는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부림사건은 청년들이 영장 없이 체포, 구속되어 

대공분실에서 몇십 일 동안 온갖 고문과 협박으로 

공산주의자로 조작되어 재판을 받게 된 사건입니다

 

 

노무현과 김광일 등의 여러 변호사는 

이 사건에 대해 무료로 변론에 나서게 됩니다.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악용될 경우

정권의 도구로써 얼마나 무서운 악법인지 알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당사자들은 몇 십 년이 지나 무죄를 선고

받습니다. 이 사건 이후 변호사 노무현은 

본격적으로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훗날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죠. 

 

 

그는 이후 여러 시민운동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변론을 맡기도 하고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차리기도 

했습니다.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서기도 했죠. 

재야에서 인권 변호사와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통일 민주당 총재 김영삼 전 대통령

과의 인연으로 그의 권유를 받아 정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그는 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됩니다. 

 

 

이후 1988년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가 열립니다

 

그는 이 청문회에서 5공의 핵심인사인 장세동,

안현태 등과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 등을 상대로 

집요한 추궁을 하고 논리적인 질의를 펼쳐 

'청문회 스타'로 등극합니다.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장면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죠.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떠오르는 스타 정치인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각별히 아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90년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노태우, 김종필과 손을 잡고

3당 합당을 선언합니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그가 평생 싸워온 자들과 손을 잡은 것이죠. 

 

노무현은 이를 밀실야합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결국 그는 김영삼에게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합류합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자신을 정계로 이끌어 주었고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게 됩니다

 

노무현은 이후 국회의원 재선에 실패하고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낙선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른 뒤 민주당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는데 노무현도

이 통합민주당에 합류하게 됩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5년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김영삼 대통령 이후 결국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무현은 여당의 일원이 되었고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에서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드디어 6년 만에 국회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는 다음 16대 총선에서 어느 정도 

당선 가능성이 보장돼있었던 서울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스스로 지역주의를 넘겠다며

자신이 성장한 부산 북, 강서을 지역구에서 

출마했지만 결국 낙선됩니다. 

 

 

허나 이 일은 오히려 그의 팬클럽인 노사모를 

창설시켰고 그의 유명한 별명인 '바로'라는 

타이틀을 이 때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선거는 패배했지만, 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정치적 재산을 얻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국회의원 당선에 실패한 후 그는 2000년부터

2001년 사이에 김대중 정권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내게 됩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자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뽑기 위한 국민경선제가 시작되었고

노무현도 후보로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민주당의 1위는 안정적으로 이인제 후보

였습니다. 또 한화갑, 정동영, 김근태 등 만만찮은

후보들이 있었죠 

 

 

노무현은 천천히 당내 지지율을 높여 나갔고 

무려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합니다. 

 

광주는 민주당의 보스인 김대중 대통령의 근거지

였고 따라서 민주당 내에서는 큰 의미를 가진 

지역이었습니다. 

 

노무현은 영남 출신이고 민주당 내에서 

큰 기반이나 경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는 광주 경선에서 승리합니다. 

 

 

이는 그가 노력했던 지역주의를 타파하는

의미에서도 큰 가치를 가진 승리였죠 

 

이후 노무현은 지지율이 급상승하여 

'노풍' 즉 노무현의 바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절대 대세론을 가지고 있었던 이인제 후보를 

대전, 충청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승리해 

그는 결국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새천년민주당의 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됩니다. 

 

 

그는 큰 지지도로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어추구니없게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대기록으로 인해 지지도가 상승한 정몽준이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큰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의 지지율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미 당선된 

후보를 교체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보면 노무현이 민주당 내에서 

얼마나 지지 기반이 없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노무현은 반드시 후보를 단일화할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자신에게는 불리할 수 있는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결국 이로 인해 TV 토론을 거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사실 빨리 단일화를 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양보한

것은 오히려 노무현의 지지율을 상승시켰고 

대인배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죠. 

 

그러나 그의 대선로드는 아직도 험난한 역경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일화가 된 후 

앞서 패배한 이인제가 탈당하여 이회창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는 등 진정 소인배의 밑바닥을

보여주는가 하면 심지어 정몽준은 대선 투표하는 

전 날에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 철회 발표를 했고

 

노무현은 그날 심야에 정몽준의 자택을 방문하였으

나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뒤끝 작렬에도 불구하고 결국

16대 대선이 시작되었지만 정몽준의 추태에 

그가 지지를 철회했음에도 진보진영은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주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16대 대선은 아슬아슬한 대선으로 서로가 역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로 이기고 드디어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 됩니다. 

 

 

그의 인생은 정말 역전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이 컴플렉스였던 청년은 

고졸 출신으로 유일하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양복 한 벌 맞출 돈도 없었지만

 

연수원에서도 최상위권 성적으로 판사로 임용되죠

 

시민 활동을 하며 인권변호사로 활약했고 

정계로 들어와 쉬운 길을 마다하고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어려운 길을 자처해 

들어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기고 했으며

절대 우위였던 이인제를 노풍을 일으키며 

쓰러뜨리고 월드컵 효과를 본 정몽준과의 

승부에서도 승리하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아슬아슬하게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우리 대한민국 전체의 대표자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의 '인간 노무현'은 

인생의 승리자라고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최고의 위치까지 오른 그런 사람이었죠. 

 

사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하늘이 돕는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을 타고 났습니다. 

 

박정희가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일본제국군의 장교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6.25에 참전하고 

공산당 좌익 활동을 하다가 사형까지 구형받았지만

그는 위기를 극복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대통령까지 오르게 되죠. 

 

 

전두환 같은 인물은 본인도 인정한 대로 

머리가 좋지는 않은 사람이지만 

 

그는 박정희의 군사 정변 때 

바로 그의 비위를 맞추며 출세의 길을 달렸고 

 

정승화가 하나회를 쳐내려고 할 때

과감한 결단력과 준비해둔 조직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됩니다. 

 

 

또 이회창 같은 인물은 김대중과의

15대 대통령선거도 전설의 이인제 의원의 난으로

여권표가 분열돼 아쉽게 패배하더니 

 

유력한 당선 후보였던 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들의 병력 비리가 터져 몰아치는 노풍을 

직격으로 맞고 2번 연속으로 아쉽게 패배하죠

 

 

역사가 보여주듯 정점에 오르는 사람들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 외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운과 시대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 같은 경우

시대의 선택이 혼란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무력을 사용해 군사정권을 세운 강력한 지도자를

선택했다면

 

민주화 정권들을 거친 2000년대 중반에는

노무현 같은 올곧은 드라마를 가진 사람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물론 올바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정치와 경제를 더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노무현도 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대한민국의 집권자가 되지만

 

 

앞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련은 그가 지금까지

겪은 일들과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는 험난한 

일들이었습니다. 

 

참조 : 역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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