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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인사이트

행복은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데 있다 ________ 절제의 기술

by 아트온다 2024. 3. 13.

 

 

 

 


 

 

 

★ 행복지수 세계 1위 덴마크가 사랑한 인문학 명강의

★ 내려놓는 삶의 즐거움!

★ 무언가를 해내지 않는 법을 알려주는 책

 

 

 


 

 

 

- 절제의 기술 / 스벤 브링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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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제의 기술   ||

저자 : 스벤 브링크만

덴마크 오르후스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현재 알보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절제의 기술 / 스벤 브링크만 -

 

 


 

 

‘더 빨리 더 많은 일을 해내라’, ‘계속 성취하라’, ‘짧은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여행하는 법’ 같은 주제의 책들 말이다. 더 적은 시간에 남보다 더 많이 성취해내는 생산성 향상법을 다루고, 그렇게 재빨리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효율적’인 여가 활동을 통해 ‘균형 잡힌’ 삶을 살라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무언가를 해내지 않는 법을 알려주는 책은 많지 않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천천히 하면서 더 적게 성취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은 거의 없다.

- 절제의 기술 / 스벤 브링크만 -

 

 


 

 

더 빨리? 하루도 쉼 없이. 그렇게 계속. 1년이고 5년이고 10년이고. 그러다 20년. 그러다 42세가 된 봉애. 논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산 것 같다. 무언가를 한 것 같긴하다. 책도 보려고 노력했고 남들이 한 번 쯤 기웃거리는 시험도 쳐보려고 노력했다. 봉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감히 속내를 꺼내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봉애는 생각했다. ‘나만 그런가’ ‘내가 이상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은 다들 남들이 살라는 대로 잘만 사는 것 같다. 남들이 살라는 삶도 쉽지는 않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공무원을 하거나 좀더 눈을 높여 고시에 합격하거나. 봉애의 선택은 그것뿐이었다. 

 

봉애가 가야할 길을 그것밖에 없다는 듯 주변이 압박해 들어왔다. 20대의 여자의 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입에 풀칠은 할 줄 아는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봉애는 도전했고 또 도전했고 소풍갈 때 책들고 가는 어리석은 짓도 매번 했다. 


 

아마 공부한 연습장만 키 높이 몇 배는 되지 않을까? 거기에 쏟아부은 돈만해도 집 한채 값은 나오지 않을까? 좀 과장하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봉애는 실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이고. 일기를 쓰지 않아서 그때의 기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그랬었지. 그 정도. 

 

그런데 이제 와서 드는 의문은, 과연 하루 종일 강의를 보고 책을 보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공부의 시간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강의를 보면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강의를 듣는 시간은 오롯이 공부하는 시간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공부한 시험지를 풀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어. 무작정. 듣고 보면 언젠가는 쌓여서 시험에 합격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봉애는 42살이 되고서야 알았다. 

 

좀 일찍 깨달았다면, 20대의 봉애는? 30대의 봉애는 어땠을까? 좀더 윤택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능력이 모자란 것도 모르고 눈만 높아서 자신의 능력을 과도하게 믿고 어설프게 나서지 않았을 텐데. 어설프게 나섰다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세상 사람들 탓만 하면서 홀로 고립되진 않았을 텐데. 아쉽지만. 지난 과거이고 봉애의 삶의 일부분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계속 무언가 성취를 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룬게 없어서 성취에 집착했다. 뭔가 하나는 얻어 걸려야 하는데, 이 또한 쉽지 않았던 봉애는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이 못났고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고는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다. 분석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점검하지 않은 채 그렇게 20년을 보냈다. 

 

누굴 탓할까? 모두 봉애 자신의 탓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은 알았다는 것. 잘못된 방법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의 결과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안좋다는 것. 메타인지가 조금은 높아진 것 같다. 

 

‘더 빨리 더 많은 일’을 아직도 추구하고 있긴 하다. 돈도 많이 벌고 싶고 그 돈으로 살고 싶은 삶이 있고 남들이 뭐라 하건 내 쪼대로 살아도 꽤 괜찮은 삶을 살 고 있다고 삶으로 말해주고 싶고. 명예도 갖고 싶다. 세상에 아무것도 내놓은 것 없이 죽는 건 너무 서글프다. 


 

세상과 사람과의 부딪힘, 그로 인한 괴로움과 고통이 그저 일어난 것이 아니란 걸. 매개체로 드러나 과거의 아픔이 승화되는 환희를 느끼고 싶다. 그래서 봉애는 매일 똑같은 루틴으로 오전 이렇게 카페에 나와 글을 쓴다. 

 

재빨리 이뤄내고 남은 시간에 쉼을 갖는 삶을 추구한적도 있었지만. 성취한 게 없어서 쉼을 오래 쉬어본 적도 없었다. 이것 조금 하다가 다른 곳에 흥미가 생기고 다른 것에 조금 하다가 또 다른 곳에 흥미가 생기고를 반복했다. 지금 하고 있는 게 있어도 다른 할 일에 눈이 갔다. 봉애는 생각했다. 왜 그런걸까? 두고 고민을 한참하다가 요즘 유행하는 그 ADHD가 아닐까? 자문해 보았다. 그럴 것도 같았다.

 

방 안 책상 위 텀블러에 물 받으러 부엌에 갔다가 싱크대 설거지 쌓인 것을 보고 설거지를 하고 바닥에 뭐가 밟히면 바닥을 쓴다. 전형적인 ADHD였던 것. 물론 전문적 검사는 해보지 않았지만. 요즘 유튜브가 전문가의 판단 기준처럼 많은 정보를 주고 있고. 봉애는 자신의 행동을 빗대어 보니 어쩔수 없는 ADHD였다는 것. 


 

그래서 하나의 일에 집중 못하고 이 일 저 일 서성거렸구나. 스스로는 쓰담쓰담하며, 그렇다고 ADHD가 일을 성취하지 못하리란 법 없다. 산만한 작업 스타일을 오히려 활용해보자는 심상으로 하루를 일상을 보내고 있다. 

 

방법 부재, 성인 ADHD. 이러한 이유로 성취가 없다고 봉애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한 가지 든 생각은. 빨리 많이 또 다음을 이루고 이루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차피 대개들 사는 방법을 따르지 않은건 결혼시즌부터다. 비혼주의를 선언하면서. 직업은 숨어서 내 시간 자유롭게 보내면서 살기 시작했을때부터 세상의 틀을 약간은 벗어나 있었다. 본능적인 거였는데, 돌아보니 MZ세대의 끝물이면서도 꽤 선두에서 이러한 삶을 살아오고 있던 것이다. 

 

취업은 어렵고 결혼은 싫고. 대학생활때 경제사정 때문에 삶이 피곤했고, 30대가 되어서 여전히 경제적인 사정때문에 삶은 혼탁했지만, 내 집 없이 내 차 없이 다행히도 간간히 월세 집, 아빠차를 이용해 간혹 여행도 가고, 돈을 많이 쓰지 않고도 기분이 충만해지는 여행법을 터득하게 되고, 혼자 있음으로 해서 더욱 나 자신이 되어 가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요즘 TV에서 떠들어대는 ‘취업 안하는 청년 몇십만명’뉴스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낙오자로만 비추는 이유는, 청년들이 취업을 안하면 세금을 거둘수 없고 물건을 사지 않으니 기업을 매출이 줄어 결국 기업의 타격이 크니, 그래서 취업 안한 청년들을 더욱 낙오자 취급하는 뉴스들이 연일 계속해서 떠들어 대는 걸, ‘저건 아니라고 ‘속으로 되내는 봉애. 실은 더 잘 살고 있다는 걸 뉴스만 모르고 있다고 핀찬을 해대는 것이다. 

 

봉애는 더 잘 살고 있다. 뉴스에서 말하는 청년 취업자 통계 수치에 한 사람 명분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라는 말이다. 왜 청년의 행복 지수는 묻지 않는지.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비전이 없어보여서 선택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 취업하지 않는 거란 건 왜 얘기하지 않는지.

 

취업 안한 청년으로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보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40kg짜리 쌀가마니를 어깨에 짐으로 진듯 살아온 봉애는 안타까웠다. 그렇게 살아온 봉애 자신이. 그리고 수많은 지금의 청년들이. 봉애의 나이로 보자면 청년은 조금 지난 나이이니까. 


 

이젠 좀. 다르게 살아도. 기업에 취업을 하지 않아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도 자기 철학 있는 청년들. 자기 삶의 행복의 기준이 기성 세대가 생각 하는 것과 다름을 서로 무언으로 통용해주는 시대. 그 시대가 온다면, 봉애 나이 얼마쯤일까?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무언가를 해내지 않는 법’을 알려주는 책은 없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해내는 방법은 차고 넘친다. 그것이 맞는 방법인지 저자 그대에게만 맞는 방법인지,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자신을 시험삼아 해보고 해봐서 나온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서 자기 것을 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책에서 발견한, 그래서 삶에 적용해 그 삶으로 살고 있는 인간은 어떤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까? 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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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효율적인 사람도 세상 모든 행복을 손에 쥘 순 없다. 행복한 상태를 24시간 내내 유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일을 해내면서 끝도 없이 계속 새로운 행복을 찾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적게 성취하더라도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는 일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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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사실 별개 아닌 곳에서 발견할 때가 많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건 맞는 말이다. 봉애도 행복을 발견할 때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햇살 좋은 날에 눈을 감으며 햇빛을 쬐고 있을 때 너무 행복하더라는 것.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내면이 충만해져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경지. 천국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천국은 이미 봉애가 사는 지구 상에 놓여져 있는데 발견하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두었다. 누가? 인간 스스로가. 

 

햇빛은 무한대다. 언제든. 구름 낀 날이 아니면 만날 수 있다. 기왕이면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조건은 더 좋다. 언제고 마음 편한 상태에서 준비 없이 햇빛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늦은 오전도 좋고 점심 먹고 정오가 조금 지난 오후도 좋다.

 

사실 봉애의 주관적 경험상 햇빛은 오전 10시에서 11시가 가장 상큼하다. 물론 생계를 위한 계획 때문에 오전의 시간을 카페에서 거의 다 보내지만, 가끔은, 날이 너무 좋은 날은 곧장 햇빛이 내리쬐는 야외 테라스 카페에 들르기도 한다. 커피는 자리값일 뿐 봉애의 목적은 야외 테라스에서 가만히 앉아 햇빛을 쬐는 것이다. 그거면 된다. 


 

자연이 거저 주는 것에 ‘성취’라는 단어가 어울릴까? 그냥 생각의 전환일 뿐이다. 이미 살아 있음에, 사지 멀쩡함에 이미 주어진 행복인 것을. 우리는 관계에 감정이 자꾸만 엮어 이미 가진 것을 많이도 놓치고 있다. 이 쉬운 사실은 어쩔수 없이 인간의 감정이 깊이 패이고 극에 달할 수록 더욱 멀어져 간다. 

 

봉애는 100억을 벌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더 적게 성취하고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가? 싶지만, 인간에게 가치를 주는 일만으로도 벌 수 있는 그 길을 가고 싶다고 봉애는 다시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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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다양한 선택지와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개인은 쉽게 파편화된다. 일도, 취향도, 우리의 삶과 정신도, 한 사람의 단단한 삶은 그저 많은 일을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해내는지 판단하는 멀티태스킹 능력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몇 가지를 선택하고, 거기에 지속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능력이 더욱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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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다양한 선택지와 유혹’이 가득했지. 실은 봉애도 여전히 스카웃 제의가 있다. 어디 거창한 건 아니고. 일 좀 해달라는 부탁. 뭐 일에 대한 댓가는 제대로 지급되는지 알 수 없는 프리랜서 영역에서, 일을 해주면 얼마를 주세요! 라고 당당하게 거래를 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해서 일을 다 하고 나서 ‘왜 돈 안 주세요!’라고 따질줄도 몰라서, 한 번 일 때문에 틀어진 관계는 절대 다시 보지 않는다.

 

봉애는 그렇게 세상에서 나와 자기만의 공간에 숨어 들었다. 자기 주장이 약해서, 자기 뜻을 입 밖으로 말할 줄 몰라서, 대신 회피하는 방식으로 항의를 한 셈이다. 이 방법이 통했느냐? 하면. 그렇기 한 것도 같고. 왜냐면 돈의 피드백이 정확하지 않은 상대가 다시 또 봉애가 필요해서 일 제안을 해올 때 당당히 거부하고 전화를 받지 않으니, 상대는 좀 답답하겠지. 라고 봉애는 생각한 것이다. 소극적인 항의이지만. 이 방법이라도 안하면 봉애는 달리 항의를 할 방법이 없다. 

 

비전도 없는 일에 잠시 잠깐 쓰이다가 버려지는 기분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능력을 쌓기 위해 봉애가 들인 노력들 시간들 돈들은 다 무시되는 기분. ‘너 할 줄 아니까 이것 좀 잠깜 해줘’라고 봉애가 들인 모든 것을 그저 할줄 아는 능력으로 잠시 잠깐 해줘도 되는 그런 부탁정도로 ‘해달라’는 무례를 봉애는 더 이상 받아줄 수 없었다. ‘그냥 너가 알아서 하세요’ 봉애의 마음에서 울렸다. 


 

한 개인의 쓰임은 파편화됐다. 필요할 때 잠깐 쓰다가 좀 시일이 지나서 다른 능력이 필요해서 제안을 하다가, 그러면서 인간은 맞춤 능력 발휘로 소모되어 가고 쌓이고 쌓이는 이력이 아니라 쓰다 버려진 하나의 레고처럼 파편화되어 갔다. 

 

봉애야, 봉애야. 이젠 한 가지 일에 집중하자꾸나. 네 나이 42살이다. 50대를 마주해야 하고. 60대도 올 수 있고. 90세까지 살면 어쩌나? 대책 없지? 그래. 봉애는 대책 없다. 20대 때도 그랬고 30대 때도 그랬는데, 하루 아침에 달라지겠는가. 대책 없이 괴롭게 살았는데, 어찌 저찌 살아져는 왔다. 그게 인생인가?

 

아마도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간간히 먹고는 살 수 있게 일거리를 주고 계시는 건가? 한 때 신앙인으로써, ‘네 먹을 것은 걱정하지 마라. 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리니’라는 비슷한 구절을 마음에 지니고 있던 터라. 그런 것도 같은 삶을 20년 간 살아 온 것 같다. 

 

봉애의 인생에도 전환점이 올까? 한 가지에 골똘히 집중하고 있는데, 오겠지? 그렇게 살려고 다짐하면서 매일 루틴대로 오전 카페 타임에 글을 쓰고 있는데, 오겠지? 온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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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많은 경험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나 ‘안 돼’,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능력, 어떤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능력, 다시 말해 절제의 기술을 얻기 위한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나 사회 전체로서나 이런 기술이 부족하다. 오랫동안 자원 소모와 과소비를 통한 무한 성장의 이념을 삶의 토대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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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살면서 필요한 건 뭘까?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짜 살만한 삶은 뭘까? 봉애는 고민했다. 그것이 아니고서 인간이 태어날 이유가 없다. 고통을 당하기 위해 태어 났다고? 이토록 힘들라고 태어났다고? 그건 아닐 것이다. 신이 있다면 그건 아닐 것이다. 괴로움은 행복이 뭔지 알려주기 위해 상대급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치일 뿐이다. 괴로움을 알지 못하면 행복이 뭔지 알 수 없다. 괴로움을 당해야만 행복으로 가는 가치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이 해야할 일은 행복에 좀 더 머무르는 방법을 선택해서 과감히 가는 것이다. 그 길로 가는 지혜를 쌓아가는 것이다. 태어난 대로 살면 태어난대로 괴로울 수밖에 없는 구조. 부모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습관들을 벗어날 수 없다면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 부모가 남겨 준 습관들을 깨고 나와야 한다. 알을 깨야 한다. 

 

봉애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기준으로 모든 걸 선택해 왔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모가 준 습관이라는 알을 깰 수 없었다. 그 알 안에서 갇혀진 채 세상에 치이며 괴로워했다. 알이 있는 줄 몰랐기 때문에 왜 괴로운지도 알 수 없었다. 봉애 자신이 반응하는 방식에서의 문제는 찾지 못하고 그저 세상이 과도하게 봉애에게 가하는 ‘가해’만을 탓할 뿐이었다. 

 


 

그 ‘알’을 깨는 순간. 봉애는 보였다. 한 겹을 벗기고 나니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봉애의 시각이 변했다는 것을. 

 

봉애는 어제까지도 일의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이제 그만’ 봉애의 마음을 갉아 먹고 단지 행했으니 쌓이는 경험만 있는 그런 삶은 더 이상 살지 않겠노라고, 되새김질 하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달 일하고 얼마를 받은 들, 지금처럼 루틴처럼 해오던 일상들은 깨질 것이고 지난 12월 달부터 줄곧 이어온 ‘축적’은 한 달이라는 공백으로 인해 다시 무너질 수도 있을 터였다. 봉애는 별로 큰 결심이 필요 없었다. 애초, 결심이 단단했으므로. 얼마를 주든 지금 봉애의 삶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는 없으므로. 연이어 걸려오는 전화 두 통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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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원칙은 ‘기쁜 마음으로 뒤처지기’이다. 미학적 관점에서 절제는 단순하며, 그렇기에 아름답다. 화려한 유행 대신, 더욱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에너지와 자원을 더 의미 있는 활동에 쏟도록 해주는 단순한 의례에 미학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행에서 뒤처진 채 약간의 부족함을 즐기는 일도 얼마든지 예술적인 삶의 기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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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뒤처지일 때로 뒤처져 있는데, 딱히 ‘뒤처짐’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일 생각은 없다. 뒤처진 것 뒤처진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뒤처진 건 앞서간 사람이 있는 것이고 실패했다는 건 성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봉애는 정확히 ‘뒤처졌고’ ‘실패했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팩트’인 것이다. 

 

낙오, 낙방, 실패 많이 해봐서 그다지 ‘패배감’이 들지도 않는다. 그려려니, 그저 돈이 없어서 슬프고,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아서 ‘홀로’를 선택할 뿐이다. 어쩔수 없다. 인정과 돈은 벗어날 수가 없다. 돈이 있어야 오전에 카페에 나와서 작업도 할 수 있는 걸.

 

원낙 물건을 아무데나 놓는 성격이라 지저분해진 집 안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므로, 되도록이면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싶고, 빡 집중애서 하고 싶단 말이다. 봉애는 돈과 인정을 목적 삼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과 인정 없이 살 수 있나? 있어? 없지! 그렇지? 그럼. 봉애는 왠지 돈과 인정은 부정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인정 욕구를 버려라, 돈을 추구하지 마라. 때론 이것이 인생 최대의 삶의 방향인냥 가치관 삼아 살아온 적도 있었다. 그 습이 조금은 배어 있는 탓에 여전히 늬앙스가 ‘돈과 인정’에는 부정적인 향이 도사리고 있지만, 극복하고, 봉애는 훨훨 날아 들판을 뛰어다닐 것이다. 돈과 인정이 살아난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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