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부터 1949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중국은 약 100년동안
서양과 일본 제국주의에 침탈당하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으로 가보겠습니다.
1780년 당시 청나라인 중국은 '차'가 굉장히
잘 팔렸습니다. 그때만해도 영국에서는 상류층들이
차를 즐겨먹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차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도자기까지 같이 수입했는데요.
중국은 이때 도자기 만드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
다고 합니다. 도자기가 영어로 china인데요.
지금의 china가 이때 생겼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죠.
그렇게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는 댓가로
영국은 은과 시계같은 아주 고급진 물품들을
중국에 팔고 있었습니다.
당시 차는 대량으로 수입하면서 워낙
고급물건들을 쥐꼬리만큼 수출하다 보니
영국은 남는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이 적자를 어떻게 해결할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주 좋은 생각 하나를 해내는데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아편을 이용한
것이었죠. 인도가 아편을 재배하고 그것을 중국에다
팔아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받아온 은은 다시 영국에게
토해내고 면제품 같은 것을 답례로 받아오는 것이죠.
이렇게 차와 은을 동시에 얻으면서 삼각무역은
시작되었고 영국은 재미를 아주 톡톡히 봅니다.
여기서 아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잠깐
보겠습니다. 양귀비라는 꽃이 있습니다.
색도 선명하고 참 예쁜 꽃이면서도 아주 무서운
꽃입니다. 아편이 바로 이 꽃에서 생산이
되기 때문이죠.
아편은 양귀비의 덜 익은 꼬투리에서 유액을 말려
채취하는 마약의 일종입니다.
덜익은 꼬투리를 긁어서 상처를 내어
흘러내리는 유액을 채취를 하는데
이 유액이 특이한 냄새가 나며 강력한 쓴맛이
난다고 합니다. 이 유액이 말라서 끈적한 황색
잔존물이 생기면 나중에 긁어서 떼어내고 특별한
곰방대를 사용하여 이 잔존물을 작은 램프의 불로
발연시켜 흡연합니다.
현재도 의약품 중에서 마취제, 강력한 진통제의
상당수가 아편계 약물이며 잘못 처방해서 약을
처방 받은 환자가 마약중독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국 상인들은 육체노동으로 지친 중국의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아편을 팔기 시작합니다.
아편을 펴본 사람ㄷ르은 그 쾌감과 중독을 끊지
못하고 계속해서 밀수입하였고
'아편굴'이라고 불리는 비밀 장소에서
아편을 피우거나 또는 아편 주사를 맞는 일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아편의 영향력은 퍼지고 퍼져, 이제 하층민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에 퍼져 나갔습니다.
중국의 1/4이 아편을 피울 정도였다고 하죠.
이러한 풍조로 중국에서는 부패와 전투 능력 상실,
국가 기강 해이, 농촌 경제 파탄, 재정 타격 등
갈수록 그 타격은 커져만 갔는데요.
이렇게 중국은 아편의 수입 대금을 은으로
결제하면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자 중국도
단단히 화가 나게 됩니다.
그래서 임칙서라는 중국의 정치가가
외국인 상점을 봉쇄하는 압박을 가합니다.
1839년 6월 3일 임칙서는 23일에 걸쳐
외국 상인들의 아편 20,000상자를 모두 녹여버리는
등 철저히 아편 단속을 시행하고 마약상들은 결국
홍콩으로 철수합니다.
이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자
화가 난 영국은 입장이 반으로 나뉘게 됩니다.
도자기건 뭐건 아주 박살을 내자는 전쟁파와
그래도 영국의 명예를 지키자고 외치는 전쟁반대파로
말이죠. 결국 투표가 진행되었고 결과는 271 : 262
표로 아슬아슬하게 전쟁파가 이기게 됩니다.
그렇게 1840년, 영국은 단단히 무장하고 중국으로
처들어갑니다. 사실 단단히 무장할 것도 없이
중국은 영국에 비해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거의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었습니다.
단일 전투 중 영국군은 단 36명만 전사했다는
전투도 있었습니다. 결국, 중국은 영국에게
무릎을 꿇고, 서명을 하게 됩니다.
항구를 개항하여 영국의 물건을 더 팔아 넘겼고
외국 무역 독점상인을 없애면서 중국에게
물건을 팔 때 세금을 덜 내게 하였습니다.
바로 '난징조약'입니다.
홍콩은 1년 전부터 영국이 강제로 점령하고 있었지만
이 기회에 정식으로 뺏어옵니다.
그렇게 십여년이 흐르고 그동안 영국은 개항된
항구로 중국에 수출하고자 하였습니다.
면제품을 주력상품으로 내놓고 말이죠.
하지만 당시 중국은 사회경제적 구조가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해서 수입제품을
꺼려했고 심지어 중국 농촌에서 생산해낸 면포가
값도 싸고 질도 좋았기 때문에 굳이 호되게 당한
영국의 것을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중국에 물건을 팔 수 있는 지역을
넓혀 달라고 했지만 중국은 전혀 응하지 않았고
이에 영국은 호시탐탐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한가지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바로 중국에 들어온 영국의 해적선 '애로호'가
검거를 받던 중 영국의 국기를 훼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조정은
애로호에는 국기가 걸려 있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영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하찮은 이유를 구실로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때마침 중국에서 프랑스 선교사 한 명이
처형되는 일이 벌어져 프랑스 또한 영국과
손을 잡게 되고 러시아, 미국도 연합군과 함께
전쟁에 끼게 됩니다.
다들 본심은 중국을 점령하고 싶었던 것이죠.
연합군을 구성한 영국과 프랑스는 광저우 시내를
점령하고 시가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베이징의 관문인 톈진까지 점령하자
중국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톈진조약'을
맺게 됩니다.
영국이 그토록 원했던 무역확대를 위한 추가
항구가 서명되었고 피해 배상금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각각 400만 200만 달러의 은을 지불하게 됩니다.
톈진조약에서 본것과 같이 서양의 외교관은
베이징에 상주가 가능했지만 중국은 서양의
군사는 수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관을 수호하겠다며
2200명의 병력과 21척의 선박이 강제로 들아왔고
중국도 자신이 수도만은 지켜야 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했습니다.
이번에는 베이징 코앞에까지 서양군대가 밀고
들어왔으며 교섭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10월 6일 교섭 중에 연합군은
인류사에 남을 문화적 만행 하나를 저지릅니다.
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원명원
이곳은 건륭제가 유럽과 중국의 미학을 집대성하여
이루어 놓았던 것인데 영프 연합군의 손에 무참히
파괴돼 폐허가 되어버립니다.
또한 그들은 점령지에서 살육, 방화, 강간, 약탈을
행하였고 '야만인'이라고 불리기를 싫어했던 자신들이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야만적으로 충족시켰습니다.
당시 중국의 황제, 함풍제는
결국 베이징에서 열하로 피신을 하고
형제 중 한 명인 공친왕을 시켜 연합군과 협상을
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공친왕과 연합군의 협상에 의해 전쟁은
종결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중재하에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아편무역이 합법화가 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죠.
중국은 이렇게 자신의 나라가 대국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서구 열강들 또한 중국을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출처 : 궁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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