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정치 9단, 김영삼의 모든 것!

by 아트온다 2021. 1. 15.

대한민국 현대사의 진정한 거물!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며 정치 10단!

정치의 끝판왕!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영삼은 1927년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영삼은 당시 지역에서 그럭저럭 부유한 집안의

자식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하죠.

 

김영삼은 일제강점기하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통영중, 경남고를 졸업하게 

됩니다. 

 

김영삼은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터지게 되고 

학도 의용군에 입대하기도 했죠.

 

김영삼은 전쟁이 끝나고 국회부의장이었던

장택상의 비서가 되어 정계에 들어가게 되고

 

 

자유당 이기붕의 입당 권유를 받아들여

3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고향 거제에 출마하여 당선,

 

최연소 국회의원의 기록을 쓰게 됩니다. 

 

이후 김영삼은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이승만의 3선 제한 철폐에 반대하였고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자유당을 탈당, 민주당에 합류하게 됩니다. 

 

김영삼은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서구에 출마하여 낙선하지만

4.19혁명 이후 다시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됩니다. 

 

 

김영삼은 2공화국 수립 후 민주당 구 세력들이 

신민당을 창당하자 신민당에 입당합니다. 

 

김영삼의 정치적 고난의 길은 이후 시작되는데

2공화국은 아주 잠시 유지된 과도 정부였고 

 

1961년 5.16군사 쿠데타 이후 

김종필 등에게 회유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전부 거절합니다. 

 

김영삼은 군정의 연장이 발표되자

이에 반발하여 반대 시위를 하다가 잡혀 

형무소에 들어가기도 했고 

 

박정희 정권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가게 됩니다. 

 

 

김영삼은 1969년 박정희와 김형욱 중정부장을

비난한 직후 자택 앞에서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와의 경선에서 

패배 후 이를 인정하고 그를 밀어주기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가 다시 당선되었고 

이후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함으로 

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유신 선포 직후는 김영삼과 민주화 인사들이

가장 큰 탄압을 받았던 시기로 

김대중은 철저하게 탄압당하여

대한민국을 떠나게 되었지만,

 

김영삼은 귀국하여 돌아옵니다.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직에서도 밀리게 되었지만

후에 다시 총재로 복귀합니다. 

 

사실 신민당 내에서도 유신에 어느 정도 

친화적인 온건파가 있었지만,

김영삼을 비롯한 강경파는 철저하게 

유신 정권타도, 민주 회복의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김영삼과 신민당은 1979년 YH무역의 노동자들을

위해 신민당사를 농성 장소로 빌려주었고 

 

철야 농성을 시작했지만, 경찰 2,000명이 

투입되어 무자비하게 이를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이를 박정희 정권에서는 투신자살 사건으로 

조작했으나 훗날 강제진압 과정에서 

추락한 것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에서 그의 제명안을 발의하였고

 

김영삼은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제명당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부산, 경남 일명 PK 지역의 민심은 폭발하게 

됩니다. 

 

 

이는 그 유명한 '부마항쟁'을 촉발하게 되고 

이는 유신체제 아래서 일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대규모의 민중항쟁이었습니다. 

 

이는 김영삼이 부산, 경남에서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마항쟁은 사실 유신이 무너지는 데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즉 이 YH농성-부마항쟁-10.26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김영삼이 중심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부마항쟁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는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암살당하게 되고 

 

드디어 전국적으로 민주화의 꿈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일었지만 곧이어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에 이은

1980년 김영삼은 가택 연금 조치를 당하게 되고 

김대중은 사형선고, 김종필은 보안사 감금조치가

취해지며 탄압을 받게 됩니다. 

 

김영삼은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신군부의 압박에 정계 은퇴까지 선언하게 되죠. 

 

5공화국 아래서 찍소리도 할 수 없었지만,

김영삼은 1983년 민주화 요구를 다시 주장하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군부가 이때 음식 냄새를 일부러 

풍기면서까지 그의 단식농성을 깨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죠. 

 

이는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후 김영삼의 가택 연금이 풀리게 되고 

많은 민주화 세력이 결집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김영삼은 무너진 야당을 결집하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며 김대중 사면복권과

직선제 요구 등을 말하며 자신의 계파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 모두를 아우르는 민주화 

세력의 결집을 이루어 냅니다. 

 

 

1987년 전국적인 민주화의 열기와 항쟁 등으로

5공화국은 결국 항복하였고 노태우를 필두로

직선제와 김대중 사면 등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인 6.29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번에야말로 국민들은 민주화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 환호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 김종필

일명 3김의 거물들은 절대 섞을 수 없는

물과 기름이었습니다. 

 

이 3김이 단일화를 하지 못하고 

총출동한 13대 대선에서 결국 노태우가 당선되게

됩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에 따른 책임론을 피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다음을 노리며 각기 다른

계파를 이끌고 다음 대선을 준비하게 됩니다. 

 

 

노태우 정부는 앞선 군부정권의 철권통치와

탄압을 풀고 많은 민주화인사들에게 

본격적인 정치참여를 보장하며 진행되었습니다. 

 

민주화 정부의 여러 가지 요소와

제도들을 보장하고 시행하였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군사정권 인사들의 

청산요구는 여전하였고 

 

노태우의 여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며

정국은 여소야대의 상황으로 플러하게 됩니다

 

노태우는 위기를 극복해야 했고 임기가 

흘러감에 따라 다음 정권에 대한 생각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김영삼과 김종필에게 동맹을 제안하게 

됩니다. 

 

김영삼과 김종필은 그들대로 4당이 

경합하는 지금의 상황에선 다음 대선에

당성되기가 쉽지 않다는 계산을 하였고 

 

결국 대한민국 정치사에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3당 합당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200석이 넘는 초거대 야당을 탄생시켰고

충청, 경북, 경남이 여당의 지지기반으로 

들어가게 되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김대중은 이는 정치쿠데타라며 반발했고 

김영삼에 의해 정계에 들어온 노무현의원 역시

이를 '밀실야합'이라며 맹비난하고

김영삼을 떠나게 됩니다. 

 

사실 이는 정치적으로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평가할 때 김영삼은

여기서 바로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김영삼은 인생을 자존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정치 인생 전반을 수많은 회유와 탄압으로

살아왔지만, 자존심 하나로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살아왔고 민주화 인사 시절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김대중을 대선에서 밀어주기도 했고 

 

신군부 시절엔 김대중계와 다른 민주화 

인사들까지 포섭해 우선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우선임을 설득하며 일시적으로 통합을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정치적 계산으로 

그를 그렇게 탄압하고 억압했던 유신의 

유산인 김종필, 앞선 군사정권의 핵심 인물인

노태우와 손을 잡은 것이죠. 

 

 

즉 김영삼은 그가 평생을 싸워온 적들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김영삼은 이 결정으로 

2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합니다. 

 

우선 1여당으로 노태우의 지원을 받아

자금적인 면을 해결합니다.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정치자금

3,000억을 주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90년 초 3,000억이 어떤 금액인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성탕면 200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역 기반의 지지가 중요한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노태우의 대구경북TK와

김종필의 충정권의 표까지 흡수함으로 

 

김영삼은 실제로 서울과 호남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승리하며 14대통령에 

당선 됩니다. 

 

 

김영삼은 평생을 자존심 하나로 살아왔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 그는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이 자존심을 잠시 접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잠시'라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김영삼은 이용할 것은 이용하고 취할 것은 

취하기 위해 잠시 그들과 손을 잡은 것이지

훗날 대통령에 당선되고는 군부정권의 

유산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5공화국 인사들과

노태우까지 죄를 물어 심판합니다. 

 

당권 차원에서도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김종필의 세력을 축출하죠. 

 

 

이것은 그가 왜 진정한 정치 10단인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김대중은 또다시 패배하고 

떠나게 됩니다. 

 

김영삼의 초반 인기는 엄청났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민주화 정부,

문민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고 

국민들은 그에게 커다란 기대를 했죠. 

 

김영삼은 대권을 잡기 전 철저한 

민주화의 투사로 김대중과는 또 전혀 다른 

투쟁의 길을 걸어왔고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욕을 먹기도 했지만, 

그는 군사정권의 청산과 5.18진상규명 등을 

진행함으로 어느 정도 자신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해소하기도 했고 당권 핵심부에 언제나

그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따라왔던 

 

상도동계 인사들을 배치하고 밀어줌으로써 

견고한 정권 차원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고 

 

이 정치적 행보를 걸어가는 과정에서 

삼국지 유비를 능가하는 사람 보는 눈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회창, 노무현, 이명박, 김무성, 홍준표, 김문수

등등을 직접 정치권으로 영입하기도 했고 

 

그가 직접 공을 들여 영입한 인물들은 

보시다시피 하나같이 정치권의 거물이 되고 

 

 

2명은 대통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영삼의 인간적인 부분은 삼국지로 보면

조조와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명분을 중시하면서도 절대로 손해보는

짓을 하지 않으며 철저한 계산을 하면서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물들을 기용하고 

배치합니다. 

 

자신이 철저하게 싸웠던 인물들과 손을 

잡으면서도 그들을 단죄하고 

그들이 중심세력으로 떠오르는 걸 축출했으니

말이죠. 

 

여담으로 김영삼은 학벌이 엄청나게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 의외로 단 한명뿐인

유일한 서울대 출신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김영삼의 행보는 철저한 독자노선을 걷던 

김대중에게도 큰 교훈을 주게 됩니다. 

 

김대중은 앞선 패배에서 배워 뚝심을 접고

다시 돌아왔을 땐 김종필과 손을 잡게 됩니다. 

 

김종필은 자신은 정점에 오르지 못했지만

3김의 다른 2명 김영삼, 김대중을 정점으로 

만들어 주는 데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3김은 서로 싸우면서도 

화합하고 또 싸우고 이용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아직까지도 그 계파가 어느 정도는

이어져 오는 가장 중요한 정치 거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의 큰 지지로 시작된 김영삼 

정권이었지만 

김영삼 정권은 당 차원에서도 국가 차원에서도

커다란 혼란과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처 : 역사TV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의 모든 것

극악무도한 패륜을 저지르고 색에 미쳐 수많은 여자를 강간했던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왕. 연산군 성종(조선9대 왕)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 1494년 왕위에 오르게

artist1.tistory.com

 

 

이병철 회장, 이건희의 아버지 그의 인생 이야기, 이병철 가계도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님의 파란 만장한 삶을 알아봅니다. 이병철은 기업인으로서 삼성 설립자 겸 3대 회장입니다. 전자 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artist1.tistory.com

 

 

마키아벨리 군주론 5분만에 순삭

1469년 어느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정치철학의 역사를 바꾼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인데요. 당시 이탈리아는 밀라노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로마교황청,

artist1.tistory.com